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2일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발발

산풀내음 2017. 2. 24. 21:42

18614 12,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발발

 

1) 미국의 성장

 

미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았고, 1789년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주로 구성된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연방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연방파(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중앙 집권주의)와 반연방파(독립적인 권한을 유지하려는 지방분권주의)의 대립으로 매우 불안정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면서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챙겼다. 그 과정에서 영국의 방해로 미국의 선박들이 나포(사람이나 배·비행기 등을 사로잡음)되는 일이 벌어지자, 다시 영미 전쟁(1812~1814)을 벌였다. 이 전쟁 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한 것은 서부로의 영토 확장이었는데, 맨 먼저 1803년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이후 1819년 플로리다를 차지했다. 1845년에는 텍사스를 병합했으며,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할양 받았다. 이로 인해 1840년대에 이미 대서양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는 대륙 국가로 발전하였다.

 

 

2) 전쟁의 서막

 

북부의 주들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한 공업과 상업이 발전하였다. 이에 비해 넓은 평야가 대부분인 남부는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면화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농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할 당시부터 연방파(북부)와 반연방파(남부)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 오던 이들은 새로 편성된 서부의 주들이 자유주(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주)를 택하느냐, 노예주(노예 제도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주)를 택하느냐를 둘러싸고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미국 의회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하원 의원의 수가 결정되는데, 남부 지역의 400만이 넘는 노예들이 비록 선거권은 없지만 인구수에 포함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만약 선거법상 유리한 남부 측이 하원의석을 더 많이 차지할 경우, 북부는 세력을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양측 모두 노예제 폐지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부와 북부의 이런 숨겨진 갈등은 1817년에 미주리가 새로운 미연방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자유주와 노예 주가 각각 11개였는데, 미주리 주가 노예제를 채택할 경우 그 동안 유지되어 온 남북의 세력 균형이 깨어질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 1777-1852) 상원의원은 1819매사추세츠 주의 분할(자유주로서 메인주의 독립), 1820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을 통해 위도 36 30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노예주로, 북쪽은 자유주로 결정하면서 양측간 비율을 1:1로 맞춰 갈등을 수습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이후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등의 새로운 주가 편입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당시 세력 판도

 

양측의 갈등은 스티븐 더글러스가 캔자스-네브라스카 을 제안하게 되며 다시 불거진다. 미주리 협정에 따라 준주에서 주로 승격될 캔자스는 자유주로 편입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인민주권의 논리에 따라 각 주의 주민들이 노예제 존폐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게 하자는 내용을 이 법안에 넣었다.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까지 합세해 부정선거를 한 끝에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캔자스 땅의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또 문제가 터지는데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유주의 마을 로렌스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한 복수로 급진 해방론자였던 브라운과 그 아들들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농부 5명의 손을 자르고 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일이 일어났고 사실상 캔자스는 피 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 1854-1859)라 칭하는 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이 때 미주리 협정을 파기하는 판결이 1857년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이었다.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은, 미주리 주에 오기 전에 자유 주와 자유 준주에 살았음을 내세워 자신이 자유 신분임을 밝혀 달라는 소송을 미주리 주 법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대부분 남부 출신이었던 연방 대법원 판사들이 흑인은 미국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없으므로,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미주리 협정은 준주 지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선언하였다.

 

 

 

3) 남부의 탈퇴와 전쟁의 시작

 

남북 전쟁이 일어나는 데 불을 붙인 것은 바로 1860년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에이브러험 링컨 (Abraham Lincoln, 1809 2월 12~1865 4월 15) 이 북부지역의 표만 가지고 39.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었다.

 

 

이미 의석수도 북부 공화당에게 뺏긴 상황에서 민주당은 분열되고 대통령직까지 공화당에 넘어가게 되자 불안을 느낀 남부 주들은 1860 12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연방을 탈퇴하였고, 1861 2 4,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08-1889)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2 8일 기존의 미 헌법에서 본을 딴 헌법을 제정하여 대신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를 수도로 (후에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이전) 아메리카 남부맹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건립한다.

 

Jefferson Davis is sworn in as President of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on February 18, 1861, on the steps of the Alabama State Capitol.

 

이에 링컨은 취임식에서 남부에 대해 탈퇴를 취소할 것을 그리고 불응 시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보냈다. 여기에 반발한 남부는 자국 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국내의 연방군 요새와 병기창 등을 차례로 무력 점령한다. 1861 4 12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 항 인근에 있는 섬터 요새의 연방군이 철수를 거부하자 남군은 요새를 공격하였고 주둔하던 연방군대는 반격 한번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이날 희생된 것은 단지 말 한 필이었으나 5년간의 남북전쟁의 시발점이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가 남부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곧 신생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노예제 허용주들이 남부로 간 것은 아닌데 버지니아의 서부(웨스트 버지니아),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연방에 잔류했다.

 

 

4) 전쟁의 확대

 

링컨은 민병대를 소집한 뒤 조속한 진압을 지시했고 두 달 만에 맥도웰 장군이 이끄는 북군이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를 향해 출정해 본격적인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7 21, 불런 강(버지니아 주 북동부 머내서스에 위치)에서 남부군과 만나 최초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북부군은 ‘철벽 장군’이라 불리는 토머스 잭슨과 보러가드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에게 패배하여 워싱턴으로 후퇴했다(1차 불런 전투).

 

북부, 즉 연방은 정부조직이 이미 잘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에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의사결정이 신속하고 유연하여 물자 동원도 훨씬 수월했다. 국력도 공업의 발전으로 전쟁물자 생산에서 우세했는데 당시 총기생산량의 97%가 북부에서 나왔다. 여기다 전쟁 중에 4000Km 이상의 철도를 가설했고, 기존의 철도망도 계엄령을 통해서 국유화를 실행한 결과 잘 갖추어진 철도망과 효율적인 운용 덕분에 병력이나 물자 수송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북부의 목표는 연방의 재통일과 반란군인 남부의 진압이었다. 전략목표는 명확하게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였다. 북부의 대전략은 전쟁 시작 당시의 북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 장군이 남부를 경제적으로 말려버리기 위해 입안한 소위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이 중심이었다. 남부의 전 해상을 봉쇄한 후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동/서로 쪼개는 것이 그 골자였다.

 

남부는 근본적으로 주의 발언권과 자주성에 의거해 탈퇴한 주들이 모여 결성된 만큼 각 주들의 발언권이 상당히 강력한 지방자치제였다. 주정부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군대는 이미 군대가 조직된 북부와 달리 새롭게 구성해야 했으며 기병의 경우 말 주인이 자기 소유의 말을 가지고 참전하는 등 민병대이자 기사단 성향도 강했다. 여기에 상기했듯이 생산력 차이로 군화도 지급 못 받아 자비로 마련해야 하거나 맨발로 가야 할 지경이었다. 무기의 질 역시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남부의 목표는 연방에서 독립하여 아메리카 연합국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략적 목표 및 세부 전략 수립이 부실했는데, 전반적으로 "고향에 쳐들어 온 양키"를 격퇴하고 조국을 지키는 형태의 작전만이 이루어졌다.

 

동부지역에서는 전쟁 초반 남군이 고향을 지키겠다는 열의로 모인 병사들과 명장 로버트 E. 장군 등이 포함되는 우수한 지휘관들의 기여 등에 힘입어 승승장구하였다. 전사자 통계를 분석해 보면 남군 1명이 사망할 때 북군은 3명이 죽었다.

 

전쟁 초기 남군은 버지니아를 침공한 북군을 격퇴하다 못해 워싱턴 D.C.까지 위협했었다. 하지만 이런 남부의 움직임은 결정적인 연방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미치지 못했으며, 1862 9 17일 첫 번째 대규모 회전인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 남부에서는 이를 Battle of Sharpsburg라고 함)에서 남부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남부의 공세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양군 합쳐 약 23,000명의 손실이 발생해 합중국 역사상 단일 전투로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투이기도 하다. 이 전투는 전술적인 승리의 의미보다도 에이브러햄 링컨노예 해방을 선언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음으로써 북군에게 있어 전략적인 승리의 의미가 더 컸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관련된 예비선언문을 1862년 9월 22 발표했다. 1863 1월 1 이후부터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반란 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이다. (본 선언은 1863 1 1일에 발표)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관심도 많았던 동부전역에 비해 남북전쟁의 서부전역은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콘다 계획에 따른 서부 대전략은 충실하게 이루어지면서 남부연맹의 서부는 북부의 손에 넘어간다.

1863 7 4, 미시시피 유역의 마지막 남부 요새였던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함락된 빅스버그 포위전은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남부의 동/서가 단절되어 텍사스아칸소 주에서 남부의 다른 지역에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시찰 중인 링컨 대통령


the southern army during the American Civil War

 

여기에 그 다음날인 18637 5일에 동부에서는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이를 분기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11 19일 링컨 대통령은 격전지인 게티즈버그에 세워진 국립묘지 개관식에 참석하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5) 남부의 항복

 

빅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그랜트 장군은 체터누가(남부의 전략 요충지)에 포위당해 있는 북부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 장군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 테네시 강 유역으로 진격하였다. 후커 장군과 셔먼 장군이 보낸 증원 부대까지 합세한 북부군은 룩아웃 산과 미셔너리 산맥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남부군을 물리치고 테네시 강을 장악하였다(체터누가 전투. 11 23~25).

 

서부 전선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 그랜트 장군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1864 3월에 북부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북부군은 서부 전선에서는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9 3일에 애틀랜타를 점령하고, 11월에는 대서양 쪽으로 진격하여 12 20일에 해안 도시 서배너를 함락시켰다.

 

또 그랜트 장군이 직접 참여한 동부 전선에서는 남부군의 주력 부대인 리 장군의 노스버지니아 군단을 섬멸시키기 위한 총공격을 펼쳤다. 북부군은 1864 5, 월더니스 전투부터 계속 남부군을 무찌르면서 진격하여 피터즈버그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포위한 지 9개월 만인 1865 4월 그랜트 장군은 파이브포크스 전투(최후의 결전)에서 남부군의 주력군인 노스버지니아 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그 결과 남부군의 리 장군은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49일에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항복을 했다.

 

 

6) 전쟁의 결과

 

1865 , 남부군이 항복하면서 미국의 노예 제도는 사실상 끝이 났다.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1861부터 1865 사이에 해방되었다.

 

북부의 완전한 복구 작업은 재건 시대 라고 알려진, 전후 상당히 혼란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103만 명의 사상자(당시 인구의 3%)가 발생했고, 사상자 중 62만 명은 군인이었으며 그 가운데 2/3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남북 전쟁은 미국이 지금껏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의 사망자 수와 맞먹는 수많은 미국인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1860년대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3~43세 백인 남자 전체의 8%가 전쟁으로 인해 사망했고, 이 수치는 북부 인구의 6%, 남부의 18%나 된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이렇게 많은 이유 중 하나로 돌격 등과 같은 나폴레옹 식 전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정밀한 강선의 개발과 미니에 탄환, 그리고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북군에 의해 사용된 ‘스펜서 연발총’이나 시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개틀링 관총’에 의해, 개활지에 포진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제1 세계대전 당시 주요한 전략으로 쓰인 전쟁 참호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