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2일

장제스(蔣介石), 상하이서 반공쿠데타 (4.12 사건, Shanghai massacre of 1927)

산풀내음 2017. 2. 2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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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蔣介石), 상하이서 반공쿠데타 (4.12 사건, Shanghai massacre of 1927)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당시, 중국 공산당은 불과 200명도 못 되는 군소 정당이었다. 그러나 국공합작 이후로 국민당 명의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발언력을 확장해나갔고 이 과정에서 국민당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공산당을 추방해야 한다는 강경론적인 입장이 대두했지만 쑨원은 이에 결사 반대하였다. 그러나 1925 3월 쑨원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국민당 좌파는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한편 1926 7월에 시작된 장제스의 북벌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927 3월 상하이와 난징이 국민혁명군의 손에 떨어졌다. 1927 3 26일 아침에 장제스는 군함을 타고 상하이에 입성했다. 상하이의 군벌 세력들은 노동자들의 폭동에 타격을 입고 거의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버린 것을 접수한 상황이라 상하이에서의 장제스의 입지는 좋지 않았다. 상하이의 대중은 반외세, 공산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고 이들은 상하이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독자적인 실력 행사에 나서고 있었다.

 

노동조합과 공산당원들은 무력 충돌을 빚으며 자신들의 집권에 방해되는 반대파들을 처단했고 매우 강력해진 공산주의자들은 저우언라이를 보내 장제스에게 공산당원들에게 치안권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이 요구를 당연히 거부했다. 그러던 중 3 26일 상하이 폭력단의 3대 거두 중 한 사람인 황진룽(黃金榮)이 장제스를 찾아와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곧 이어 상하이 암흑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두웨성 역시 장제스에게 협력을 약속했다.

 

한편 이러던 와중에 상하이의 노동규찰대는 점차 독립적인 권력을 수립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상하이를 공산화 시키려고 했다. 이에 불안감을 품은 상공계층과 조계에 주둔한 외국인들은 장제스에게 치안을 확보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공산당을 제압할 명분까지 확보하게 된다.

 

4 12일 새벽 4, 두웨성의 민병대 2천명이 백색 완장을 두르고 길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장제스의 군대는 그들에게 적극 협조하면서 길을 터주었다. 공격을 알리는 나팔과 군함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남색 옷을 입은 자들이 노동조합 지부와 노동자들의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민병대들과 장제스의 군대들은 좌익분자들을 보이는 족족 총살하거나 참수했고 일부 포로들을 산채로 기관차 화로에 던져 태워 죽였다. 목에 8만 위안이나 되는 현상금이 걸린 저우언라이도 상무인서관의 종업원 클럽에서 체포되었지만 가까스로 탈출했다. 날이 밝자 경찰은 400명이 죽고 300명이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사망자는 족히 두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민당 측은 후일 이 때 사망자는 90여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앞서 11일 밤 황진룽의 청방(靑幇)이 공산주의 계열의 상하이 총공회 노동자 규찰대의 무기고를 접수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공산당원


 

13일 상하이노동자는 이에 대해 총파업으로 항의하고 6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시위대가 군 총사령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자 군대가 기관총을 발사해 1백 명의 시위대를 죽였다. 두웨성의 조직원들과 장제스의 병사들이 온 상하이를 수색하여 공산당원들을 색출하였다. 다섯 개 좌익 조직이 공격 당해 1천명이 체포되었고 집회와 행진이 금지되었다. 당시 상하이에 있었던 에드거 스노우는 5천명에서 만명이 죽었다고 추정했고 작가 한쑤인은 8천명이 죽고 노동자들의 딸과 아내 6천명이 매음굴에 팔려나갔다고 보았다.

 

장제스가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세운 것은 4·12쿠데타가 일어난 날로부터 겨우 6일이 지난 4 18일이었다. 국민당 좌파가 장악하고 있던 우한의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쿠데타에 강력 반발했다. 하지만 군권을 장악한 난징 국민 정부는 우한 국민정부를 흡수, 통합하였으며 이후 국민당은 4.12 쿠데타를청당(凊黨)’으로 표현했다. 결국 이 쿠데타는 1차 국공합작의 와해로 이어졌다.

 

 

청방의 두목 황진룽의 배짱과 굴욕

 

1949 5 26일 국민당군 25만 명이 상하이에서 투항하거나 도망쳤다. 이틀 뒤 공산당은 상하이에 인민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장제스의 후견인으로 공산당원과 노동자 학살에 앞장섰던 청방의 3명 중 장샤오린은 이미 암살당했고 두웨성은 홍콩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가장 연장장인 황진룽은 상하이를 떠나지 않았다. “천명에 따른 뿐이다. 어짜피 늙은 목숨이다라며 태연자약했다. 수십 년간 3 사람은 무슨 일이던 만사형통이었다. 그래서 다들 대형(大亨)이라고 불렀다.

 

황진룽이 상하이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변화가 무쌍한 때일수록 변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확고한 자신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거르지 않는 것이 있다. 아편, 마작 그리고 목욕이었다. 황은 공산당의 천하가 된 후에도 여전히 집안에 아편을 쌓아 놓고 즐겼다. 그의 집은 지하의 황제답지 않게 단출했다. 아들, 손주, 며느리 그리고 하인 등 20명 정도가 한집에 살았다. 정원도 담도 없었고 주변이 모두 부하의 집이어서 사실 한 구역이 그의 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진룽은 목욕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는 대중탕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란스럽게 하는 목욕을 즐겼다. 집에서 하는 법은 없었다. 그의 고향에는 아침에는 피부가 물을 받아들여야 하고 밤에는 물이 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나름대로 해석을 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차를 여러 잔 마시고 온종일 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놀다가 밤만 되면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두웨이가 홍콩에 가자고 했을 때, 그는 자신 같은 팔십 노인이 매일 밤 갈 수 있는 대중탕이 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하이 인민정부는 황진웅의 사업 중 도박장과 사창가를 제외하고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불만은 컸지만 인민정부는 모른 체했다. 1951년 반혁명 소탕운동이 시작됐다. 집 앞에 군중이 몰려와 비판대회에 나오라외쳤다. 황의 악행을 고발하는 고발장이 산처럼 쌓여 갔다. 다급해진 황진룽은 반성문과 함께 청방 간부들의 명단을 공안국에 제출했고 사회봉사를 하겠다며 그이 영화가 서린 대세게의 문 앞을 빗자루를 들고 쓸기 시작했다. 인민정부는 그 모습을 공개했다. 이로써 인민정부의 골칫거리인 청방이 몰락했다. 그는 그렇게 3년을 살다가 85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