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9일

이승만의 폭정에 항거한 4.19 혁명

산풀내음 2017. 3. 3. 21:55

1960 4 19,

이승만의 폭정에 항거한 4.19 혁명

 

1) 살인마 이승만의 집권 야욕

 

1959 6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돌연히 이승만의 뜻에 따라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되었다. 통상 5월에 선거가 치러지므로, 무려 10개월 또는 11개월 전에 후보를 지명한 것이다. 7월 31,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상고심을 맡았던 대법원의 그 재판부에서 7 30일 재심을 기각하여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그 다음날 바로 처형된 것이었다. 이로써 이승만과 대통령 당선을 두고 경쟁할 사람은 이승만에 맞서 싸울 투지가 별로 없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밖에 남지 않았다.

 

간첩죄 등으로 검거된 죽산 조봉암(오른쪽)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환갑을 맞는 해인 1959 7 31일 사형에 처해져 8 2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이승만은 12 11 '반드시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피력한 이후 계속 그 주장을 했고, 1960 1 27일에는 '농번기 전의 선거가 자신의 수 년 동안 지론'이라고 못 박듯이 말했다.

 

조기 선거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는 조병옥(1894 5 21 ~ 1960 2 15)의 건강상태였다. 조병옥은 1월 29 '조기선거는 등 뒤에다가 총을 쏘는 격'이라고 반대하면서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2 15일 서거하였다. 둘째는 대통령 취임이 8 15일 이어서 만일 3 15일에 야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간의 이승만 정권 행태로 미루어 볼 때 5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 박사의 유세모습

 

 

2) 2.28 대구 학생 시위

 

시위의 시작은 2 28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 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 120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 구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3) 3.15 부정선거와 3.15 마산 의거

 

1960 3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 2월 25 하와이에서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이번에도 단독후보가 되었다 (물론 지난 대선 때도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다). 이 틈을 노리게 된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선거 전날인 3월 14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런 가운데 마산지부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로 들어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으며 민주당 마산 지부는 최초로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개표도 안한 통에서 이승만이 기표된 용지가 우루루 쏟아져 나왔기 때문. 심지어 투표하러 갔는데 표를 받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민주당 간부들은 옛 마산교도소(현재의 불종거리 삼성생명 앞)에서 시민을 모아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은 사태에 기름을 붓는 짓을 저지른다. 어느 고등학생이 경찰서장이 든 확성기를 빼앗아 들고 자유를 외치자 서장은 그 고등학생을 곤봉으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패버렸던 것.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저녁 즈음 옛 마산시청 앞에 모인 시위 인원은 만여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 경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8명 사망, 80여명 부상.

 

마산 시청 앞에 몰려온 시민들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행진하는 시민들

 

 

4) 4 11, 2차 마산의거

 

3.15 마산의거 당시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4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성난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였으며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차량들이 대파된다. 그날 밤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27일 동안 행방불명이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5) 4.18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1960 3월 15의 부정선거를 계기로 마산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학생 데모에 호응, 서울에서는 4월 18 고려대학생 3,000여 명이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를 행진하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고려대학교 유진오(兪鎭午) 총장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귀교 도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에서 대한반공청년단의 소속에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했다. 당시 취재한 동아일보 최경덕 기자에 의하면 학생들은 40, 취재한 기자는 6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거리로 나선 고려대 학생들, 이것이 민주화를 위한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정치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진 고려대 학생들

 

 

6) 4.19 혁명

 

1960 4월 19,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으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기동화된 무장시위대원들은 저녁무렵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었다. 오후 640분경 소방차와 트럭등에 분승한 시위대원들이 종로3가를 지나다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쌍방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다. 40여대의 차량에 분승, 밤거리를 질주하며 시위하던 수백명의 시위대는 숭인동 근처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잠시 주춤했으나 밤8시경부터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 그리고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했다.

 

4월 24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 사임선언을 했다. 4월 26 오후 1시에 이승만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리하여 오후 2,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4월 26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허정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자 처벌을 약속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기붕 처벌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기붕의 처벌을 거부했다. 대신 망명을 결정하였다.


한편,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4월 27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 5월 29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 7월 19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뒤졌다.

 


경무대로 진입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행렬


어린이들도 이승만의 독재와 살인행위에 들고 일어섰다.


중고등학생들도 이승만 정권에 분노했다.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시위현장으로 향하는 서울대 문리대생들

국민을 죽여서라도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승만은 결국 시위 진압에 군을 투입

경찰과 대치 중인 시민들

계험군과 대치 중인 시민들


적선동 해무청 앞 시위 군중에게 쫓기는 경찰





1960 4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조재미 계엄군 사단장(가운데 군복 입고 두 손을 치켜든 사람)이 중앙청 앞에서 지프에 올라 시위대와 함께 이 대통령의 하야를 환영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김일성보다 더 자기 우상화에 열을 올린 이승만의 동상을 철거하는 시민들

1956년 국민들은 배고파 허덕이고 있을 때 자기 우상화를 위해 동상 건립식을 가지고 있는 이승만() 19604 4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당일 민중들이 철거한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더러운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망가는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