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 나치스에 봉기

산풀내음 2017. 3. 3. 21:37

19434 19,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 나치스에 봉기

 

동유럽 전체의 게토에 남아있던 많은 유태인들은 독일군에 저항하기 위해 밀수한 무기나 사제 무기로 무장한 저항군을 조직했다.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약 100여개의 유태인 단체를 통해서 지하 저항 운동이 형성되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독일군에 대한 저항은 바르샤바 게토(Ghetto)에서 있었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을 격리하기 위해 1940 11월 설치된 바르샤바 게토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유태인 40여만 명이 좁고 열악한 위생상태 하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그 곳에는 비명과 시체만이 난무했다.

 

Warsaw Ghetto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게토의 유태인들

폴란드 유태인 여성들을 학살시키기 위해 강제로 숲속으로 끌고 가는 독일군들

 

본격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을 시작한 1942년 여름, 독일은 유태인들을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로 이송해 처형시켰다. 이런 와중인 1942 7 28일 바르사뱌 게토에서 트레블링카 집단 학살 수용소로 1단계 이송이 진행되는 중에 유태인 투쟁 조직(ZOB, Zydowska Organizacja Bojowa, 유태인 투쟁 조직이라는 의미)이 만들어졌다. 1942 7 22, 독일군은 1942 9 12일까지 사실상 중단 없이 계속되는 대량 이송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25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게토에서 이송되거나 학살된다. 유태인 청년 조직 단체들의 회원들로 구성된 그리고 23세의 모데카이 아니레비츠(Mordecai Anielewicz)가 이끄는 Z.O.B.는 게토의 유태인들에게 이송에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이동 학살 부대와 학살 수용소 유태인들의 대량 학살 소식이 이미 게토로 흘러 들어 왔다. 그러나, ZOB는 아직 봉기할 단계가 아니다. 9월에 이송이 끝난 후, ZOB는 지하 정치 조직의 회원을 영입하고 훈련, 무기 및 폭약을 제공한 폴란드 저항군과 접촉한다.

 

사실, 말이 저항이지 폐쇄되어 외부와의 연락과 물자 반입도 어려운 게토에서 제대로 된 전투 준비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소수의 유태인 저항세력이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였던 독일군에 맞서 싸워봤자 어차피 승산은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짐승처럼 도살될 것이다. 따라서 저항을 택한 사람들은 무력하게 죽느니 '싸우다가 인간답게 죽기'를 결심하였다.

 

1943 1 9, 하인리히 힘러가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하여 유대인들을 이송할 것을 명령했고, 1943 1 18일 독일군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이송을 재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ZOB(유태인 투쟁 조직; Zydowska Organizacja Bojowa)의 저항에 직면한다. 이른 아침에 ZOB 조직에 대한 기습 검거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서 독일군에 저항한다. 게토의 다른 유태인들은 준비된 은신처로 피한다. 추방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 독일군은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다. 1 21일 독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큰 광장에서 1,000명의 유태인들을 집단 학살하지만, 추가 이송은 중지된다. 독일군은 5,000-6,500명의 유태인들을 이송하거나 죽였다. 유대인 전투 조직은 독일의 앞잡이들과 유대인 경찰을 붙잡아 처형했다. 유대인 경찰의 우두머리였던 유제프 셰린스키(Józef Szeryński)청산가리를 먹고 음독자살했다.

 

저항 활동의 결과에 고무된 게토의 유태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계획하고 준비한다. 저항 조직이 통합되고, 전략이 수립되고, 지하 벙커와 터널이 건설되고, 지붕 위 통로가 건설되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들은 끝까지 저항할 준비를 한다.

 

1943 4 18, 무력으로 빈민가를 제압하고 이송 작전을 개시한다는 정보가 전해졋다. 즉시 게토의 주민들에게 경고가 알려지고, 벙커에서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의 생일인 4 20일을 기념하여 무력으로 게토를 소탕하기로 결정했다. 4 19일은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첫날이기도 했다.

 

4 19, 오전 3 2000여명의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를 포위했다. 오전 6시경에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로 침입을 시작했다. 유대인 레지스탕스들은 화염병으로 전차를 공격하고, 무장친위대 대원들에게 발포했다.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태만해 있던 부대는 의외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7 30분에 패주하였다.


그러나, 4 19일의 승리는 방심하고 전투력도 장비도 변변치 않은 2선급 부대에게 거둔 승리일 뿐이었다. 4 20, 바르샤바 야전군 사령관 프리츠 로숨(Fritz Rossum) 소장의 파견 부대가 도착했다. 독일군은 시가전에 맞서서 초토화 전술을 실행했다. 게토의 건물에 불을 질러서 숨은 유대인들을 태워죽이는 것이다.


SS소장 위르겐 슈트로프 장군 5 16일에 "더 이상 바르샤바 게토는 없다."는 선언이 했다. 8 15분에는 진압 기념으로 바르샤바의 시나고그(유대인 회당)가 폭파 해체되었다.

 

Jewish fighters lined up against the wall



화마가 휩쓸고간 Warsaw Ghetto

 

봉기의 전체 희생자수는 확실하지 않다. 독일군의 피해에 관한 독일군의 공식 발표는 17명 전사에 93명 부상이었다. 폴란드 측에 의하면 86명 전사에 420명 부상이었으며, 유대인 측에 의하면 300여 명 사상이었다. 또한 13,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며, 56,885명은 학살 수용소로 이송되어 가스실이나 총살대에서 생애를 마쳤다. 극히 운이 좋은 유대인들은 폴란드 국내군과 공산주의자의 지도 하에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하고 있다. 모두가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거의 모두가 신을 찾고 있다. '신이시여 권능을 보여주소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신은 스핑크스처럼 침묵하고 있고 응답하지 않는다."

     1943년 당시 소녀의 일기 중에서 ….

 

항복하는 게토의 유태인들

진압 후 독일군에게 붙잡힌 유태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