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9일

미국 독립전쟁 발발

산풀내음 2017. 3. 3. 06:53

17754 19,

미국 독립전쟁 발발

 

영국이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압박을 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1775 4 19일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미국에 대해 세금을 혹독하게 부과하는 등 여러 가지 규제를 가했다. 1764년에는 `Sugar Act`라는 법을 제정하여 설탕을 수입할 때 관세를 부과했고, 1765` 둔영법` 제정, `Stamp Act제정` 등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샀다. 영국의 통치에 반발한 식민지인들은 직접세에 대한 항세 운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직접세가 간접세로 전환되었으나 이 또한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샀다.

 

독립전쟁이 시작될 즈음인 1760년대, 아메리카 식민지의 총인구는 150만명을 넘어섰다. 이는 60년전인 1700년과 비교해볼 때 6배나 늘어난 숫자였다. 인구의 증가만큼이나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경제력과 문화적 성취가 놀라우리만큼 증대했다. 거의 모든 식민지가 자치를 실시한 지 오래였을 정도였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의 더 많은 자유와 자치를 원하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달랐다. 아메리카에 대한 통제를 더 엄격하게 하길 원하는 영국과, 이미 오래전부터 일을 독립적으로 처리하는데 익숙해진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1773년 영국은 동인도 회사의 재정 지원을 목적으로 관세없이 식민지에서 차를 팔 수 있게 하는 `Tea Act`를 제정했는데 이것이 1773 12 16일 발생한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보스턴 차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제1차 대륙회의가 개최됐다.

 

1775 4.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1천명이 토머스 게이지 장군의 지휘 하에 콩코드(Concord)로 향했다. 민병대의 탄약과 무기들이 들어있는 무기고를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영국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두 명의 전령이 밤새 말을 달려 이러한 사실을 민병대에 알렸다. 다음날인 4 19, 영국군이 렉싱턴(Lexington)에 도착했을 때 영국군 앞에는 수십명의 민병대원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곧이어 총격전이 시작됐다. 이 전투로 민병대원 8명이 죽고 10명이 다쳤다. 렉싱턴에서 식민지인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한 영국군은 콩코드에서 다시 민병대와 충돌한다. 독립전쟁의 불씨에 불이 붙는 날이었다.

 

식민지 대표들이 6월에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모였다. 두 번째로 열린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대표들은 ‘무력에 호소하는 이유와 필요의 선언’을 결의하여 영국 정부에 회답을 요구하였으나 국왕과 수상의 반대로 화해는 깨어지고 만다.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자 대륙회의는 버지니아 출신 조지 워싱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전쟁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대망의 1776 7 4, 대륙회의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영국 본국과의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때까지 주저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독립군측에 가담하고, 충성파는 절망하여 영국군의 보호를 구하고 혹은 영국, 캐나다로 도망하였다. 또 독립선언의 발표는 여러 나라의 자유 애호자의 환영을 받아 국제 정세를 변하게 하였다.

 

전쟁은 7년간 계속되었다. 전쟁의 전 기간동안 영국군이 우세해 보였으나 1777 10 17일 뉴욕의 북부인 Saratoga에서 식민지 군대는 대승을 거두게 되고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 동맹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1781년 버지니아의 York Town에서도 대승하게 됐다. 이후 1783년 파리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미시시피강 동쪽의 13개주는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미국은 1776 7 4일을 독립기념일로 선언하게 됐다. 미국은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독립국가로 태어날 수 있었다. 미국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지도자와 동맹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