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2일

독일, 인류 최초로 독가스 사용

산풀내음 2017. 3. 5. 07:52

19154 22,

독일, 인류 최초로 독가스 사용

 

1915 4 22일 새벽 5, 독일군과 프랑스ㆍ캐나다 연합군이 대치하고 있는 벨기에 이프르 전선. 독한 냄새를 풍기는 황갈색 염소가스가 약 1미터 높이에 떠서 바람을 타고 독일군 진영에서 연합군 쪽으로 흘러 넘어갔다. 연막탄이라고 생각한 노란 안개가 프랑스군 진지에 도달한 그 때,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파인애플과 후추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냄새를 맡은 프랑스 군인들은 폐가 타들어 가는듯한 엄청난 고통 속에 몸부림 쳐야 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총도 내팽겨 치고 참호 밖으로 뛰어 나와 무작정 후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병사들이 연막탄이라고 생각했던 노란 안개는 바로 염소 가스였다. 그리고 이 날, 최소한 5천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이 가스에 중독되어 질식사 했다. 참호 속에서 달아났던 많은 병사들도 서서히 죽어 갔는데, 어떤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데 몇일이 걸리기도 했다.

 

German soldiers take advantage of a suitable wind to emit poison gas from cylinders, circa 1915.

Poison Gas in World War 1

A Canadian soldier with mustard gas burns, 1917/1918

British Vickers machine gun crew wearing PH gas helmets with exhaust tubes

 

당시 화학 공장의 생산 공정에서 대규모로 발생하던 산업폐기물이던 염소가스를 무기로 쓰려는 생각은 독일의 유태계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의 발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태인이었지만 철저한 독일민족주의자이며 주전론자였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자발적으로 독일 국방부에 협조 의사를 밝혔다. 이미 암모니아 합성으로 세계적인 화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자신의 이름을 딴 ‘하버 연구소’에서 그가 주도했던 일은 바로 전쟁용 독가스의 개발이었다.

 

 

최초의 염소가스 공격이 성공을 거두자 프리츠 하버는 독일에서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고, 빌헬름 황제는 직접 그를 장교로 임명했다. 성공에 고무된 ‘하버’는 더욱 효과적인 독가스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한편, 역시 유능한 화학자였던 부인 클라라 하버(Clara Haber 또는 Clara Immerwahr, 1870. 6. 21.-1915. 5. 2.)에게 독가스를 만드는 남편의 행위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 남편에게 독가스 개발에서 손을 뗄 것을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자, 자신이 도저히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클라라’는 1915 5 2,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친다.

 

학자적 양심으로 죽음을 선택한 클라라 하버

 

하지만 아내의 자살에도 하버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이후 ‘프리츠 하버’가 세상에 내놓은 독가스는 포스겐과 겨자 가스였다. 포스겐은 처음에는 눈과 기관지에 가벼운 자극만을 주기 때문에 대수롭잖게 여기기 쉽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호흡기 조직의 수분과 결합하여 염산으로 변환되어 폐조직을 녹여버려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가스였다. 겨자 가스도 중독된 지 12시간까지는 분명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 때부터 살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피부에는 물집이 잡혔고, 눈에는 엄청난 통증이 왔다. 기관지에 침투한 독가스는 점막을 벗겨내었고, 결국 군의관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들을 침대에 묶어 놓아야 했다. 이렇게 죽음을 맞기까지는 보통 4~5주가 걸렸다.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프리츠 하버(왼쪽에서 두번째)

 

독일군에 의해 처음 살포된 독가스는 곧 일차대전에서 양측이 모두 사용하게 되었고, 전쟁기간동안 독일은 68천 톤을, 프랑스는 36천 톤, 영국은 25천 톤의 독가스를 사용했다. 전쟁기간 중 사용된 독가스로 양측에서 97만명이나 희생됐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독일 독가스 개발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였던 ‘프리츠 하버’는 전범으로 지목되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중립국 스위스로 피신한 ‘하버’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1918년 노벨화학상을 수여 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했던 비정한 과학자 ‘프리츠 하버’는 그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Fritz Haber in the Kaiser Wilhelm Institute 

 

유태인이었지만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독일인으로 여겼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가지 독일 제국에 충성을 다한 ‘하버’였지만, 히틀러의 집권은 그에게는 몰락을 의미했다. 하버는 히틀러가 집권하던 1933년 재직하고 있던 ‘카이저빌헬름’ 연구소 소장직 에서 물러나 런던으로 간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경력 때문에 냉대를 받게 되어 영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스위스로 옮겨온 ‘하버’는 1934 1 29일 바젤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쓸쓸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가 만든 독가스로 그의 동족을 600만명이나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