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 새마을운동 제창

산풀내음 2017. 3. 5. 14:44

19704 22,

박정희 대통령, 새마을운동 제창

 

1960년대 후반까지 초가집이 주류를 이루던 우리네 농촌이 1970년대 들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길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1970 422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제창하였고 동년 5월부터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면서 1970년대 우리사회를 휩쓴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새마을 운동 현장 시찰

새마을 운동의 모태가 된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하고 있는 박정희

 

근면ㆍ자조ㆍ협동의 기치 아래 생활태도혁신, 환경개선, 소득증대를 통해 낙후된 농촌을 근대화시킨다는 취지로 1971년부터 정부주도하에 전국적 범위에서 지역사회 개발운동이 전개됐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된 정부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이었고, 70년대 한국 사회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국민들이 기억하는 새마을 운동도 마찬가지다. ‘대한 50, 우리 국민이 성취한 가장 큰 업적’ 1(1998 조선일보-한국갤럽 조사/ 2위 올림픽, 3위 경부고속도로), ‘해방 이후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 4(2002 한국갤럽/ 1위 월드컵 개최 및 4강 진출, 2위 올림픽 개최, 3위 경제발전), ‘정부 수립 이후 국가 발전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건’ 1(2007 서울경제신문-한국리서치/ 2위 올림픽, 3 5·18 광주민주화운동), ‘지난 50년 우리 경제발전의 중요한 계기’ 2(2009 서울경제-한국리서치/ 1위 경제개발 5개년 계획(34%), 3위 우리사회의 민주화) 등 최근까지도 새마을 운동은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국가 발전에 기여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운동은 박정희 정부에 의해1971 새마을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 1975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1973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1973 1월 16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도시새마을 운동으로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정립마을 새마을 종합개발 준공식' 전경 (1973)

 

1972 1월 31 경기도 고양의 농협대학 부설 독농가연수원에 각 지역에서 선발한 140명이 입교했다. 새마을지도자 교육과정의 출발이었다. 2주 간의 교육과정은 가나안농군학교(교장 김용기)와 안양 농민교육원(원장 김일주)의 훈련 과정을 참고해 만들었다. 농협대 김준 교수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교육 받을 사람이 늘면서 그해 경기도 수원의 농민회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3 5월 31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 1490, 1973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새마을운동 계획자는 前 건국대학교 부총장이자 농업전문가, 유대인 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 박사다. 고학으로 대학교까지 졸업한 류박사는 앞으로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우연치 않게 덴마크 왕실의 후진국 특례 유학생 제도가 있음을 확인하여 영문으로 자신의 농촌 계몽 의지를 피력, 그 뜻이 수용되어 약 10여년 간 유럽 각국과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 농촌 계몽과 현대화 등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농업교수를 역임한 후 귀국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하천정비, 교량건설, 수리시설확충, 농경지 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과 농어촌 전화, 농가소득증대 등을 들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 농촌에서 초가집은 이 때 사라졌다는 것으로 설명해도 될 정도. 현재에도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이라는 문구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그러나 1970년대 말경 농촌 새마을운동은 한계에 이르렀다. 농축산물 수입으로 농축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쌀 수매가가 동결된 데다 주택 개량 자금 때문에 농가마다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새마을운동의 제창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자 새마을운동은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를 거치면서 그 초심에서 일탈, 결국 그 끝을 맞이해야 했다. 새마을운동은 1998년 조선일보사와 한국갤럽이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공동실시한대한민국 50년의 위업여론조사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은 세계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 받고 있는 국산 정책중의 하나이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영향을 준 것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의 빈곤 극복과 복지 향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세계 개발도상국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UN은 새마을운동을 본딴 "새천년마을계획(Millennium Villages)" 아프리카 빈곤퇴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선택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울 것을 권고했다. 콩고, 가나,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등이 새마을운동을 수입해간 주요 국가이며, 다양한 국가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노력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일부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중국어로는 한국신촌운동(韩国新村运动)이라 번역하는데 특히 중국의 덩샤오핑은 중국어로 번역된 새마을운동 관련 서적을 당간부들에게 나눠주며 새마을운동을 배우라 지시했을 정도. 류태영 박사도 새마을운동 전파를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후진타오 주석도 새마을운동을 공부했으며, 이를 모방한 '신농촌운동'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