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2일

한국, 프라하 세계여자농구대회서 준우승, 첫 여자농구 세계 준우승

산풀내음 2017. 3. 5. 07:58

19674 22,

한국, 프라하 세계여자농구대회서 준우승, 첫 여자농구 세계 준우승

 

전반 스코어 40-42.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유고의 장신벽 앞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체코와 동독을 차례로 꺾은 한국팀은 전날 소련에 통한의 패배를 당했다. “또다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등번호 14번의 주장 박신자 선수는 이를 악물었다. 후반전 휘슬이 울리자 한국팀은 속공으로 유고 진영을 헤집기 시작했다. 박신자 김명자 김추자로 이어지는 공격진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패스를 앞세워 상대를 공략했다. 78-71로 역전승. 한국이 세계대회에서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1967 4 15, 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1967 FIBA World Championship for Women)가 체코에서 열려 세계 11개국이 8일간의 열전에 돌입했다. 예선전 B조에 속한 한국은 쿠바의 불참으로 운도 따랐다. 쿠바는 북한이 출전을 거부당하자 출전을 포기했다. 우리나라는 예선전 2경기에서 이탈리아를 76 56으로, 전년도 준우승팀 체코를 67 66의 근소한 차로 이겨 결승리그에 진출했다. 6개국이 진출한 결승리그에서도 동구의 강호 동독과 일본을 연달아 격파하자 결승리그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국민들이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 대회를 2연패하고 평균 신장이 25cm나 큰 소련에는 역시 무리였다. 81 60으로 패했지만 4 22일 마지막 상대 유고를 제물로 삼았다. 41, 준우승이었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세계대회 은메달, 전 국민을 열광시키고 세계를 놀라게 한 쾌거였다.

 

 

176cm의 키로 골밑을 누빈 센터 박신자 선수는 우승팀 최고 스타에게만 최우수선수상(MVP)을 주던 관례를 깨고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김추자 선수는 미기상을 받았다. 2위 팀에서 MVP가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 세계가 한국의 기술농구에 찬사를 보낸 것이다. 박신자 선수는 이때의 활약으로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세계여자농구 사상 최고 선수와 지도자 26인에 선정돼 1999년 미국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체코가 공산권 국가이다 보니 북한 관계자들이 대회기간 내내 선수단을 따라다니며 “왜 인사를 않느냐”고 시비를 걸어 왔다. 납치 위협을 느낀 선수들은 화장실도 짝을 지어 가야 했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김철환 선수단장이 강제추방을 당했다. 죄목은 기자회견장에서 한국 홍보책자를 돌렸다는 것. 한국팀은 단장이 없는 가운데 유고와의 경기를 치렀고 폐막식 참석도 생략한 채 서둘러 프라하를 떠났다. 박 선수는 서독에 도착한 직후 “상대선수들이 무서운 게 아니라 분위기가 두려웠다. 시합에 집중하기보다 어서 끝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5 7일 선수단이 귀국하자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김포공항에서 서울운동장까지 20km에 걸쳐 환영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999년 미국 테네시 주 녹스빌에는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이 세워졌다. 여자농구 규칙을 확립한 ‘여자농구의 어머니’ 센다 에벗, 올림픽 2회 우승에 빛나는 리디아 알렉시바 소련대표팀 코치, 18세의 최연소선수로서 미국에 올림픽 은메달을 안겼던 리버만 클라인 등 쟁쟁한 여자농구 선수와 지도자 26명이 헌액된 가운데 한 명의 동양인이 버티고 있었다. 이름은 박신자.... 그녀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당대 아시아 최고의 여자농구선수', '1967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MVP를 차지한 선수', '1979년 세계선수권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행정가(administrator)로 참가’

 


한국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선수

 

1907, YMCA의 총무 질레트는 체육사업의 일환으로 회원들에게 농구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는 남성들에게만 해당됐을 뿐,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로 조선 여성들이 농구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성들에게 농구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제3대 이화학당장이던 조세핀 O. 페인(Josephine O. Paine)으로 때는 1911년이었다. 그는 앞서 1893년에도 이화학당 교과과정에 과감히 체조를 배정했던 인물로 여성들의 체육활동을 도모한 선구자였다.

 

1893년의 제3대 학당장인 미스페인(Miss Josephine O Paine)과 교사들과 학생들

 

본격적으로 여자 농구가 공개된 것은 남자 농구가 시작된 1907년으로부터 무려 18년 후인 1925년이었다. 이화학당에 대학과정이 개설되면서 마련된 경기에서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서양여성팀과 맞붙었다. 키와 체력 등 모든 면에서 왜소했지만 첫 경기부터 모두의 예상을 깨고 10 1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1925년에서 1930년 대 초반까지 조선인 여학교들은 경쟁적으로 농구팀을 결성해 나갔다. 이미 농구부를 보유하고 있던 이화여고보와 이화여전을 비롯해 숙명여고보(1926), 경성여고보(1926), 진명여고보(1929), 경성여상(1930) 등이 잇따라 팀을 만들었다. 이른바 ‘학교농구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여자 농구는 지금의 전국체전인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와 당시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사가 개최한 ‘여자올림픽대회’에 숙명여고보팀과 경성여고보팀이 출전, 큰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1929년에는 숙명여고 농구단이 일본으로 원정을 떠나며 조선 대표팀으로써의 역량을 여과 없이 발휘했다. 봉건주의사회로 여성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그 의미는 더욱 크다.

 

한국 농구는 빠르게 성장하여 YMCA 중심에서 탈피, 학원 농구로 진화하였다. 1931, 조선 농구 협회를 창립하여 한국 농구의 자립을 선언하였고, 1936년에는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연희전문이 농구 사상 최초로 전 일본 농구를 평정하였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의 국호는 아니었지만 이성구, 염은현, 장이진이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여 일제의 텃세를 누르고 한국 농구인의 긍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941 12 8일 태평양 전쟁 발발하면서 우리 체육사에 어둠이 깔렸다. 일본은 서양에서 들어온 스포츠를 일절 금지시켰고,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에 1943년부터 1945 8.15 해방 때까지 남자든 여자든,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농구 경기는 일절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조선 침탈과 함께 30여 년간 쌓아온 우리 농구의 금자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945 8 15, 광복을 맞이한 우리는 ‘조선 농구 협회’를 발족하여 우리 농구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각종 대회와 사업을 창설하였다. 사업의 하나로 최초의 우리말 농구 규칙서가 발간되었고, 1947년에는 국제 농구 연맹에 가입하여 IOC 정식 회원국으로 승인 받았다.

 

1946 YMCA 체육관에서는 제1회 여자농구연맹전이 열렸다. 해방 후, 재건된 조선농구협회가 주최한 이 대회는 처음으로 여중부와 일반부로 출전 자격이 구분돼 치러졌다. 이 대회는 우리 여자농구의 발전 과정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여자농구 인프라(infra)의 획기적인 개선으로 여자농구가 성별에 관계없이 하나의 스포츠로 인정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공식적으로 여학생팀과 일반팀을 구분하여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음이다. 1948년에는 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이 공포되면서 여자 농구는 비로소 ‘조선’ 대신 ‘한국 여자농구’로 통칭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950 6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 농구는 다시 한 번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1950 6 25, 북한군의 남침으로 남한의 모든 스포츠 활동과 행사는 과거 일제 말기의 암흑기처럼 멈추게 되었다. 이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자 남녀 농구단은 본격적인 경기와 원정길에 나섰다.

 

1957년에는 여자 농구의 효시인 한국은행 여자 농구단이 창단 되었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 선수 두 명이 경기여고 졸업 후, 갈 곳이 없게 되자 당시 경기여고의 코치였던 김정신 코치가 한은에 건의 및 추진하여 현실화된 야심이었다. 이후 한국은행팀의 창단은 1958, 상업은행 여자 농구단 창단을 끌어내며 실업여자농구시대를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발전을 거듭하던 한국 농구는 1963년 박정희 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가 창설되어 새로 건립된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가졌으며, 1973년까지 총 10번에 걸친 경기 중 6회 대회를 제외한 9번의 대회에서 한국여자농구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1964년에는 대학 농구 춘, 추계 연맹전을 창설하였고, 1965년에는 제1회 서울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하였다. 1967년 제5회 체코 세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금보다 값진 은메달을 차지했고, 눈부신 플레이로 세계를 사로잡은 박신자는 세계 베스트 5에 선정 되었다. 이어진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여자농구는 1위에 올랐으며, 1968년 제2회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 대회 역시 우승하며 세계 속에 우뚝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