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5일

백정의 권익 보호를 위한 ‘형평사’ 발족

산풀내음 2017. 3. 8. 21:00

19234 25,

백정의 권익 보호를 위한형평사발족

 

1923 425,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가 발족됐다. 이 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 백정(白丁)들이 그들의 권익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자구노력의 일환이었다. 창립식의 참석자는 80여명이었지만 열광적인 호응 속에서 진행됐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가죽 건조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백정가족, 강상호선생, 신현수 선생, 1928 424일 서울서 열린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조선일보 1928 425일자) 형평사 기관지 '정진' 창간호

 

백정은 1894년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에 따라 법제상으로는 분명 해방된 존재였지만 사회적인 차별로부터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상투를 틀지 못했고 부녀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기와집과 비단옷은 금물이었고 그 좋은 혼례식날도 말을 타다가는 봉변을 감수해야 했다. 이름에 인의예지(仁義禮智) 같은 고상한 한자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일반인과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도 못했다.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양반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설설 기던 농민들까지도 백정이라면 흰눈부터 떴다.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백정을 벌레보듯 했다. 더구나 호적이라 할 민적(民籍)에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고 자식에게까지 차별이 세습됐다.

 

경상도 하고도 진주는 전통 깊은 도시였다. 역으로 말하면 고정 관념이 낙락장송처럼 뿌리 박혀 있는 동네였다. 진주에 최초로 생긴 기독교 교회인 봉래 교회에서 일이 벌어진다. 처음 교회를 개척한 커틀 선교사는 예수는 믿겠는데 백정은 인간이 아니니 내보내라는 신자들 앞에서 당황 했다. 마치 노예제도 시절과 같이. 어쩔 수 없이 따로 예배를 보았는데 1909년 부임한 리알 선교사는 이를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 백정들과 일반인(?)들과의 동석 예배를 추진한다. 백정들이 쭈뼛쭈뼛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4백명 교인 중 3백명이 아우성을 치며 일어선다. “내사 백정하고는 같이 천국 안갈끼라!” 리알 선교사도 보통내기가 아니어서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면서 버텼다. 리알 선교사는 결국 백성들에게 굴복한다. 49일간의 분쟁 끝에 결국 종전처럼 따로 예배드리는 것에 동의하고 만 것이다.

 

또 진주는 진주민란의 기억과 갑오농민전쟁의 기운이 일종의 정신적 유산으로 전승되던 동네였다. 멸시는 받았을망정 새롭게 들어서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력을 쌓은 백정 집단과 역시 과거와 단절한 청년 지식인층 사이에는 점차 연대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5 13일 발기식을 가진 형평운동은 진주 백정 이학찬과 일본 메이지대학을 유학하고 온 장지필이 주도했다. 이학찬은 상당한 자산가였지만 자녀들이 차별당하자 형평운동에 뜻을 두었고, 장지필은 총독부에 취직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 자신의 등본에 '도한'이라는 출신성분을 발견하고 형평운동에 뛰어들었다.

 

부유한 백정 이학찬은 아들을 공립학교에 여러번 입학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할 수 없이 100원을 기부하고 진주 제3야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러나 주변 학생들의 구박에 못이겨 자퇴하고 서울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시켰으나 여기서도 쫓겨났던 것이었다.

 

이 운동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 양반 출신 강상호(1887-1957)이다.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

 

그는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호소한다. 백정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거부하자 그는 아예 백정의 자식 두 명을 양자로 들여서는 그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학교로 데려다 주며 차별 철폐를 외친다. 일찍이 국채보상운동을 진주에서 주도했고 3.1운동을 주도하여 옥살이도 했고 진주 정촌면 가좌리에 살 때는 마을 사람들의 세금까지 대신 내 주었던 그는 원래 진주의 천석꾼 부잣집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많은 재산을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여기서 형평의 이름이 나온다)는 신념에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천석꾼 재산은 밑빠진 독으로 고스란히 빠져든다. 해방 이후 그는 자식들 교육을 못 시킬 정도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해방 뒤 인민위원장 같은 좌익 쪽 감투를 섰던 관계로 남아 있던 재산까지 반공 세력에게 몽땅 뜯겼다고 한다.

 

그가 고통 속에 1957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때에야 사람들은 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의 장례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출신들이 치렀다. 형평장(전국축산기업조합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끝없는 만장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는 사람들의 홍수로 넘쳐났다. 그때 옛 형평사원에 의해 읽혀진 조사를 인용해 본다. 백 마디 말보다 강상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형평사 발족 당시 진보적인 사회단체와 여론은 호의적이었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백정들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1923 5 24일 진주에서는 수백명의 농민들이 형평사 해산을 요구하며 이들이 판매하는 고기에 대해 불매·불식(不食)운동을 벌였다. 8 14일에는 1만여 명의 농민들이 형평사를 지지한 청년회와 교육회 건물을 3일 동안 파괴해 전시상태를 방불케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창립 1년 만에 조직이 12개 지사, 67개 분사로 늘어나고 5년 뒤에 회원수가 9,600여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세력이 급성장했다.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전성기 때 회원이 3 4,000(형평사 측 추산 40만명)이 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조직 내 급진파와 온건파의 내분으로 1931년 제 9회 정기대회에서 해소 건의안이 제출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36년 대동사(大同社)로 개명하고 회원의 경제생활 개선으로 사회적 지위향상을 얻기 위하여 자본금을 모아 피혁회사를 만들었다. 이후 이 단체는 정치적 색채를 띤 사회혁신운동에서 순수한 지위향상을 모색하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1937 5 1일 해체되었다

 

형평사 포스트

일제시대의 백정조합인 형평사(衡平社) 대표단이 일본의 천민운동단체인 전국수평사(全國水平社, 젠코쿠스이헤이샤)를 방문해서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