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5일

미국,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

산풀내음 2017. 3. 8. 21:29

19804 25,

미국,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1980 4 25일 연설을 통해 테헤란에 잡혀있는 인질 52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해 인질 구출(Operation Eagle Claw)에 실패했다고 발표했다.

 

이란 시간 24일 오후 730, 아라비아 해상에 있는 핵잠수함 미드웨이호로부터 이란에 억류되어 있는 인질 52명을 구출하기 위한 미군 특수부대가 대형 헬리콥터 8대에 분승, 테헤란 남동쪽 330Km 사막지역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6대였다. 다음날 25일 오전 2시 사막에서 테헤란으로 향하려던 헬기 가운데 1대에서 유압장치 고장이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카터는 인질구출에 최소 6대의 헬기가 필요하므로 작전중지를 지시했다. 그러나 부대가 철수를 시작했을 때 새로운 사고가 발생했다. 헬기 1대가 수송기 C130과 충돌, 2대 모두 화염에 휩쌓인 것이다. 이 사고로 양쪽 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카터가 이같은 강경책을 취한 배경에는 대통령 예비선거를 의식해 강력한 결단력을 미국민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The scorched wreckage of an American C-130 transport aircraft lies in the Iranian desert of Dasht-E-Kavir on April 27, 1980.

Remains of a burned-out American helicopter are seen in front of an abandoned chopper.

 

1979 11월 초, 이슬람 혁명으로 쫓겨난 ‘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전() 이란 국왕이 암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다. 이란의 회교 혁명 정부는 ‘팔레비’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11 4, 미국 정부의 송환 거부방침에 분노한 반미시위대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대사관 직원 등 모두 53명의 미국 시민들을 억류하는 사태(Iran Hostage Crisis)가 발생.

 

Demonstrators burn an effigy of Uncle Sam outside the U.S. Embassy in Tehran on November 

After storming the embassy, a group of students took 90 people hostage,

 

당황한 미국은 외교 채널을 가동해 보지만 이란의 입장은 강경했다. 팔레비를 내놓기 전에는 인질 석방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인질 억류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격변하던 이란의 정치상황과 독재자를 지원했던 미국 정부의 태도 등 복합적인 문제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란의 급속적인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이슬람 전통적인 가치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던 팔레비 국왕, 그는 비밀경찰과 군대를 이용한 독재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미국은 이란의 현대화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팔레비’ 정권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1980 4 7일 양국 간에 국교가 단절되면서 군사작전이 본격화 되었다. 독수리 발톱 (Operation Eagle Claw)으로 최종 명명되었던 군사작전은 미국의 육, , , 해병대가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였고, 긴 거리를 이동해야하는 작전특성상 2단계로 추진되었습니다. 1 단계 작전은, 이집트에서 출발한 C-130 수송기들이 특공대원들과 헬리콥터 연료를 싣고 테헤란 동남쪽 사막지대에 착륙해 임시 기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시작될 계획이었다. 이렇게 확보된 중간 급유지에서 아라비아海에 떠 있는 항공모함 ‘니미츠(USS Nimitz)’ 에서 발진한 대형 헬리콥터 8대가 날아와 연료와 재정비를 마친 다음, 특공대원들을 태우고 테헤란市 외곽의 제2 집결지로 잠입하는 것이 다음 단계였다. 여기서부터는 특공대원들이 차량 편으로 대사관 건물까지 이동해서 인질을 구출한 후 인근의 대형 운동장으로 내달리면, 사막의 중간 급유지에서 출발한 대형 헬리콥터들이 날아와 인질과 특공대를 태우고 빠져 나온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실제 작전에 돌입한 첫날부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공대를 실고 이집트에서 날아온 C-130 수송기들은 무사히 첫 번째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항공모함에서 출발한 헬리콥터들에 문제가 생겼다. 8대의 CH-53 헬리콥터 중에서 한 대는 모래폭풍 속에 길을 잃고 헤메다 항공모함으로 귀환해 버리고, 다른 한 대는 기계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했다. 기체는 포기하고 승무원들만 다른 헬리콥터가 구조해서 집결지에 도착하니 목적지에 도착한 헬리콥터는 6, 그런데 그나마 또 한 대가 가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인질 53명과 특공대원 90명을 태우고 나오려면 최소한 6대의 헬리콥터가 필요한데, 이제 5대만 남은 것이다.

 

작전 수행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특공대장 ‘찰리 벡위드’ (Charlie A. Beckwith) 대령이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 철수를 준비하던 그 순간에 헬리콥터 한 대가 재급유를 받기위해 C-130 수송기로 접근하던 중에 갑자기 휘청거리다 큰 회전날개로 수송기를 두 동강 내고 말았다. 충돌한 두 항공기에서 새어나온 기름에 불이 붙고 잔뜩 싣고 있던 폭탄과 탄약이 폭발하자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4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음 날 아침 7, 카터 대통령은 TV와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인질구출 작전의 실패 소식을 전하는 특별 연설을 합니다. “어제 밤, 본인은 지난 해 11 4일부터 인질로 잡혀 있던 미국 시민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이란에 잠입한 특공대의 군사작전을 중단 시켰습니다...사망자와 부상자의 가족들에게는 사랑하는 그 사람들의 용기에 대한 저의 존경심과 희생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작전의 실패와 함께 재선을 꿈꾸던 카터 대통령의 희망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인질들이 풀려난 것은 사건 발생 444일 만인 1981 1 20,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