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5일

크릭과 왓슨, DNA구조 발견

산풀내음 2017. 3. 8. 21:23

19534 25,

크릭과 왓슨, DNA구조 발견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밝혀냈소! 드디어 해냈단 말이오. 1953년 겨울 끝자락인 2 21,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 연구소 근처 이글 식당에 단골 청년이 들어서자마자 들뜬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뒤따라 들어온 다른 청년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두 사람이 함께 발견한 사실이 중대하기 이를 데 없어 함부로 떠들어대면 위험부담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흥분한 청년은 서른일곱 살의 영국 분자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 1916~2004)이고, 멀뚱멀뚱했던 청년은 갓 스물다섯 살의 미국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James Dewey Watson, 1928~)이었다.

 

제임스 왓슨()와 프랜시스 크릭()

 

1953 4 25일자 발행 `네이처`지에 DNA(디옥시리보 핵산)의 이중나선 구조도가 실렸다. 논문의 주인공은 바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다. 본문은 1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분량이었지만, 20세기 최대 생물학적 성과로 아직도 남아있다. 인간복제를 눈앞에 두고 있는 20세기 `유전자 공학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DNA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 1844-1895)에 의해 1869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세포(nucleus) 안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DNA는 처음에 뉴클레인(nuclein)이라고 명명되었었다. DNA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DNA가 아닌 단백질이 유전물질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1944오즈월드 에이버리(Oswald Avery) 및 그의 동료들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 정보를 보관하는 물질일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들의 이러한 추측은 1952년 알프레드 허시(Alfred Hershey)마사 이스(Martha Chase)허시-체이스 실험을 통해 확정되었다. 그리고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제임스 왓슨프랜시스 크릭에 의해 1953년 밝혀졌다.

 

 

당시 DNA의 비밀을 캐기 위한 경주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각축을 하고 있었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칭송받던 미국의 물리학자 라이너스 폴링, 영국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일찍부터 X선 회절 사진을 통해 DNA를 연구하던 모리스 윌킨스 (Maurice Hugh Frederick Wilkins, 1916~2004) 와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0~1958) 등이 선두를 다퉜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와 모리스 윌킨스()

 

제임스 왓슨은 1928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서 시카고대학교 졸업 후에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1950년 그의 나이 22세에 박사 학위를 받고, 그 후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때 그는 당시 영국에서 연구중이던 크릭을 만났다. 프랜시스 크릭은 1916년 영국 노샘프턴에서 태어나서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다가 1949년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생물학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왓슨을 만나서 DNA구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런던 노팅 힐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집이 부유하여 부족함이 없는 교육을 받고 자라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였고 1950년 킹스 칼리지에서 DNA구조 연구를 하게 되고 이때 모리스 윌킨스라는 킹스칼리지의 물리학과에 있는 과학자가 프랭클린에게 DNA연구 제안을 하게 되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이미 유전정보의 비밀이 DNA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왓슨과 크릭은 생물학과 물리학을 바탕으로 각종 데이터를 분석하며 DNA의 비밀을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DNA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를 밝혀내는 일이었다. DNA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실제 세포의 핵 속에 DNA가 어떤 모양으로 들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X선으로 사진(회절 무늬)을 찍어야 한다. 당시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회절사진은 이중 나선구조를 확신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프랭클린의  DNA X선 회절 사진

 

이 자료를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킹스 칼리지의 프랭클린의 동료 윌킨스이다. 프랭클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윌킨스는 수시로 캐번디시 연구소를 방문해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사진을 보여주고, 논문으로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제공했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도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했고, 프랭클린이 찍은 X선 회절사진에서 결정적 단서를 얻은 왓슨과 크릭은 곧 나선형 모형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이다. 1953년 왓슨이 과학저널 <네이처> 논문을 통해 DNA 이중나선을 밝힌 나이는 불과 25세다.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 세 사람은 1962 12,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상 수상대(노벨 생리의학상)에 나란히 섰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것이 수상 이유다. 이때 프랭클린이 함께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암 선고를 받고 1958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탓도 있다.

 

6년 후인 1968년 왓슨은 DNA 구조 발견의 전말을 소설처럼 쓴 책을 단독으로 펴냈다. ‘이중나선’(원제 The Double Helix: A Personal Account of the Discovery of the Structure of DNA)이란 제목의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DNA 구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그리 많지 않다. 위대한 발견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뒷담화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왓슨은 연구 업적을 앞다퉈 이뤄내기 위해 과학자들끼리 펼치는 치열한 신경전과 암투, 갈등, 속임수, 실패와 좌절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저자 특유의 직설과 유머가 포개져 과학에 대한 재미까지 돋운다. 이 책에는 연구에 대한 왓슨의 몰입과 집착이 남다르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영화 관람을 무척 즐긴 왓슨은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DNA 모형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노벨상 공동 수상자가 된 모리스 윌킨스가 자신의 누이동생 엘리자베스 왓슨과 함께 점심식사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미인계를 꿈꿨다. ‘두 사람이 사귀면 윌킨스와 더불어 DNA에 관한 X선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는 장면은 성취에 대한 집념을 보여준다.

 

왓슨은 결정학 분야의 선구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성격이 괴팍하고 데이터 분석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학자로 묘사해 유족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프랭클린은 당시 가장 해상도 높은 DNA X선 사진을 찍은 과학자다. 프랭클린은 1958년 암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1962년 왓슨과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연구 업적을 쌓은 그의 공로가 파묻혔다.

 

프랭클린은여성 과학자 차별의 희생자라는 여성 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프랭클린은 여자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던 시절 대학을 다녔고, 여교수에게 식당 출입을 제한하는 시절 대학에서 연구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녀는 당당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완벽주의자였다. 영국 정부는 이 비운의 여성과학자를 기리기 위해로잘린드 프랭클린 상을 제정해 해마다 우수하고 업적이 탁월한 여성 과학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진실의 역사가 살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