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제헌 국회의원) 선거

산풀내음 2017. 3. 23. 20:44

1948 5 10,

초대 국회의원(제헌 국회의원) 선거

 

광복 후 우리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힘을 모아 신생국가를 세우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이승만, 김구, 한민당, 좌우합작세력, 좌익 등 제정파가 얽히고 설켜 분열과 혼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지지부진한 남북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고, 유엔은접촉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1948 2월에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시켰다.

 

미군정은 이를 근거로 남북 총선거 실시를 공고한다. 선거일은 1948 5 9. 그러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측의 요구로 다음날인 5 10일로 변경했다. 남한분리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좌익의 책동도 선거 성사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분단과 내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선거는 강행됐다. 적극적인 친일파를 제외한 21세 이상의 유권자 784만 명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문맹률이 80%였던 그때 막대기의 수로 표시된 번호 아래표를 찍는 식으로 투표가 행해졌지만, 보통·평등·비밀·직접 선거의 4대 원칙에 따라 치러진 이 땅 최초의 선거였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95.5%의 투표율을 기록됐다.

 


 

948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198명이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4·3사태로 연기된 제주도 몫 2명과 북한 몫 100명은 남겨두었다. 5.10총선의 결과는 무소속이 돌풍을 일으켰고 정국을 주도하려던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은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5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해 최초로 국회가 개원되었으며 제헌국회(制憲國會)의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가 당선되었다.

무소속이 85(42.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27.5%), 한국민주당 29(14.5%), 대동청년단 12(6%), 조선민족청년단 6(3%),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 대한노동총연맹 1, 교육협회 1, 단민회(檀民會) 1, 대성회(大成會) 1, 전도회 1, 민족통일본부 1, 조선공화당 1, 부산 15구락부 1명이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의원들

 

이후에도 신생국 수립을 위한 지난한 몸짓은 국회 개원(5 31), 대한민국 국호 제정(7 1), 헌법 공포(7 17), 초대 대통령 선출(7 20), 대한민국 정부 수립(8 15) 등으로 이어졌다.

 

5.10 총선거는 완전한 자유선거는 아니었다. 일례로 1948 329일부터 49일까지 유권자 등록기간이었는데 이때 전체 유권자의 79.7%인 약 780만 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했다. 그당시 신문들은 " 500명을 인터뷰한 결과 91%가 선거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 유엔임시위원단도 투표자 등록 부정행위의 예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했다. "미곡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행정사무실에서 등록을 실시하면서 안 하면 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해서 강제로 등록 시키기도 했으며 경찰과 우익청년단체가 등록을 권유하는 등 자유롭지 못한 현상들이 벌어졌다."

 

유엔임시위원단의 야심 머기(시리아 대표)위원장은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구도 "국민들은 경찰과 향토보위단의 억압적인 태도 하에 등록하고 투표를 강요당했다"고 말했다.

 

선거 당일, 서울에는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군 지원 하에 주요 도로와 교차로에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됐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을 휴대했다. 경찰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여자들은 투표장으로 가는데 무서워서 주위를 살피며 걸을 정도였다. 외신 기자들은 이 광경을 "계엄하의 도시 같다"고 썼다. 야심 머기는 "투표소 안이나 주변에서 향토보위단원을 볼 수 있으며, 어떤 투표소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다. 선거의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