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0일

조선대 이철규 변사 사건

산풀내음 2017. 3. 23. 20:58

1989 5 10,

조선대 이철규 변사 사건

 

1989 5 10일 광주직할시 청옥동에 있던 제 4 수원지의 관리인은 집에서 기르던 개가 다급하게 짖어대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는 뭔가를 보고 짖어대고 있었다. 도대체 뭘 보고 저러나 양미간을 모으던 관리인의 얼굴은 곧 창백해졌다. 물에 둥둥 떠 있던 것은 사람의 시신이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은 이철규.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장이었다.

 

 

광주항쟁 때 고교생으로서 부상자 후송 등을 하며 항쟁의 전말을 지켜보았던 그는 조선대학교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을 시작해서 이미 2년 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한 전력이 있는 이였다. 또 교수 이하 전 교직원을 새벽 출근시켜 몽땅 운동장 구보를 시킨 것으로 유명한 박철웅에 맞서서 100일이 넘게 진행된 학내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를 위험에 몰아넣었던 것은 그 많은 활동 가운데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의 편집장으로서 그가 쓴 기사였다. '북한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내용의 기사는 광주 지역 공안당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교지 편집부 전체에 수배령이 떨어진다. 조선대 관할 광주 동부경찰서뿐 아니라 북부경찰서, 서부경찰서 전체가 이철규에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새까맣게 탄 얼굴, 물고기가 파먹고 퉁퉁 불어버린 몸, 그리고 튀어나온 눈의 끔찍한 모습으로 수원지 물 위에 떠오른 것이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1주일 전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시신 앞에서 경찰은 처음에는 "좌경 세력 내부의 살해 가능성"을 들먹이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즉 이철규를 조종하던 불순분자가 증거 인멸과 꼬리 자르기의 목적으로 이철규를 죽였다는 스릴러 같은 상상력이었다. 하지만 5 3일 이철규를 근처까지 태우고 갔던 택시 기사가 등장하고, 그의 입에서 이철규가 경찰들에게 검문을 받은 사실이 있음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자살로 말을 바꿨다가 비슷한 시각 풍덩 소리와 어푸어푸 소리를 들었다는 청원경찰의 말이 나오자 실족 익사로 최종 정리가 된다. , 수사에 나선 검찰은 이씨가 5 3일 밤 1012분쯤 수원지 근처에서 검문을 받다 근처 산으로 도주하던 중 실족, 익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대학가와 재야의 진상규명 촉구 시위는 연일 계속됐고 마침내 국회 국정조사특위까지 구성돼 보름 동안 조사를 벌였으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검찰이 주장하는 실족추락 지점. 그곳은 수심이 약 1.5m에 축대의 경사가 45도인데다 수원지로 통하는 40cm 너비의 소로 옆에 석축이 이어져 있어 실족이 거의 있을 수 없고, 실족하더라도 수면에 닿기 전 몸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의문사였다. 그의 죽음의 정확한 정황은 지금도 밝혀져 있지 않다. 처음 검안했던 의사와 부검팀도 발견하지 못했던 돈 20만원이 곱게 접혀 바지 주머니에서 뒤늦게 발견된다던가 하는 이상한 일도 있었고 경찰이 밝힌 이철규의 마지막 행적도 미심쩍은 점이 많았지만 그의 시신에는 커다란 의문 부호만 붙었을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에서는 그의 검게 탄 얼굴과 튀어나온 눈 곳곳에 난 생채기들을 근거로 전기고문 끝에 죽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철규의 시신은 대문짝만한 벽보의 머리 사진이 됐다.

 

5 11일 이후 전남대 병원 부근과 광주 도심에서 "진상규명"를 요구하는 집회와 가두시위는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25일부터 전남대 병원 앞과 서울 명동성당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사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였다. 진상위측에서는 사체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고 합수부 측에 TV공개토론회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일 계속되는 "이철규 고문살인 진상규명요구에 의해 국회는 '조선대생 이철규군 변사사건 조사특별위원회(12, 이하 국조위)'를 구성하고 5 29일부터 6 30일까지 30여 일에 걸쳐 활동을 했다.

 

 

하지만 국조위는 3,000장 가량의 검찰수사결과를 검토하고 현지 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특히 사인규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재부검 요청을 검찰이 거부해 국조위 또한 의문점만 재론했을 뿐이다. 유족과 진상위측은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법의학자 로버트 커쉬너 박사를 초청하여 그의 참관 아래 재부검을 요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것과 함께 1차 부검 당시의 슬라이드 요청마저 거부했다. 국조위는 활동 종결 1년이 지난 1990 7 3일에야 활동보고서를 작성하고 의혹은 있으나 '증거가 없음'을 이유로 '익사'로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다.

 

조선대 이철규군의 가검물검증결과 설명회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