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5일

부산 정치 파동

산풀내음 2017. 4. 15. 22:36

1952 5 25,

부산 정치 파동

 

전쟁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레닌은 이 관계를 “전쟁은 정치를 다른 수단으로 연장한 것”이라고 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고 했다. 두 혁명가는 전쟁과 정치가 수단을 달리하는 권력추구방식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50 625일부터 1953 727일 사이 한반도에서는 전쟁과 정치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상황이 연출됐다. 한편에서는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정치(즉 전쟁)가 벌어졌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총도 쏘지 않고 피도 흘리지 않는 전쟁(즉 정치)이 전개되었다.

 

전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동안에도 후방에서는 전시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권력을 유지하거나 빼앗기 위한 정치가 이승만에 의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정치는 전쟁의 일부분이었으며, 전쟁 또한 정치의 연장선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전시(戰時) 정치의 정점이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었다. 이승만은 이 두 사건을 통해 1960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1948년 국회에서 초대대통령으로 간선된 이승만은 정당정치에 회의적이었기에 소위 무당정치로 즉, 자신의 당이 없이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0 5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 무소속이 의원정수의 60%에 해당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대한국민당, 민주국민당 등 기존의 정당들은 원내 소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소위 이승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국회에 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발발 초기 이승만 정부는 잦은 정책 실패 내지는 실수를 범했다. 예컨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점, 피난민이 가득한 한강교를 폭파해 많은 양민을 사상케 한 일, 국민방위군의 이름으로 동원된 수많은 청장년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건, 거창지역에서 민간인을 ‘통비(通匪)분자’로 몰아 학살한 사건은 모두 이승만 정부로서는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운 실책이었다. 야당 세력은 국회에서 연일 정부의 비정(秕政)을 질책했고, 이승만의 지지도는 날로 떨어졌다.

 

1951년 중반부터 야당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신 당시 총리이던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1952 417일 민국당, 민우회 등의 의원들이 중심이 돼 재적의원 3분의 2 123명의 서명을 받은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그러나 미국은 내각제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현행 제도하에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최선의 방안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형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당의 조직을 추진해 자유당을 1951 12월에 창당하였고, 이와 병행하여 1951 11 28일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에서 간선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안은 1952 1 18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져 찬성 19, 반대 143, 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원내의 반이승만 의원들은 1952 529일 국회에서 대통령선거를 전격적으로 실시해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이승만은 다급했다. 이에 그는 부결된 처음의 개헌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함과 동시에 1952 525일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압박했는데, 그것이 바로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승만은 공비 출몰을 이유로 525일 부산, 경남, 전남, 전북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심복인 원용덕을 직제에도 없는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헌병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앉혀 이 지역의 계엄업무를 총괄토록 했다이승만은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에 군 병력의 출동을 명령했지만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중장은 군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명령을 거부했다. 이승만이 원용덕의 헌병대에 의존해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6일 헌병대(깡패?)가 국회의원 52명이 탄 통근버스를 통째로 연행하는 폭거를 자행하는가 하면 야당소속 국회의원 10명을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야당 의원은 잠적하고 국회는 그 기능이 정지되는 헌정(憲政)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1952 5 26, 야당의원 52 명을 헌병대가 버스 채로 연행

 

최초의 정치적 상황은 이승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528일 국회는 계엄령 즉각 해제를 결의했고, 다음 날 부통령 김성수가 계엄선포를 ‘반란적 쿠데타’라고 비난하면서 사표를 냈다. 미국은 유엔한국위원단(UNKURK)을 내세워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64일 미국 정부가 이승만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에 장택상 총리를 중심으로 타협안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일부 반이승만 의원들은 여전히 타협하려 들지 않았고, 양측의 충돌은 더욱 격화됐다. 612일과 13일에는 지방의원들이 부산에 와서 직선제 개헌안 통과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국회와 미대사관에 난입하려고 했으나 저지당했다. 반이승만 세력은 620일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김성수, 이시영, 조병옥, 김준연, 서상일, 김창숙 등 야당과 재야의 반이승만 인사가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민중자결단이라는 폭력배가 난입하여 국회를 포위하고 국회의원 80여 명을 연금해 버린다.

 

1952년 국회의원을 연금 중인 깡패들

 

621일 드디어 발췌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이는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에다 국회가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면직과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인 절충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세가 꺾인 야당에게 어느 정도의 명분을 주자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국회는 정족수가 미달돼 개헌안을 표결할 수 없었다. 반이승만 의원들 중 일부는 경찰의 체포를 피해 숨어버렸고, 나머지는 국회활동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원내의 내각제 개헌세력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당수는 돈에 매수돼 넘어갔고, 감투를 약속 받고 변절하는 의원도 일부 있었다.

 

더욱이 6·25기념식상에서 야당 측이 김시현(金始顯)과 유시태(柳時泰) 등에게 사주하여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총탄 불발로 실패한 암살미수사건이 터지자, 야당인 민주국민당 등은 발췌개헌안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발췌개헌안의 추진을 위해서는 개헌결의에 필요한 의원 정족수만이 문제로 남게 되자, 정부는 피신중인 국회 의원에게 신분 보장을 책임지겠다는 등의 조건으로 등원을 호소하고 구속 중이던 의원 10명을 석방시키는 등 발췌개헌안의 통과를 서둘렀다.

 

1952 6 25일 충무국민학교에서 열린 6·25 2주년 기념식에서 발생한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발생 후 용의자 체포 장면. 부산박물관 제공

 

강제로 연행, 동원되어 연 이틀간이나 국회에 감금되어 있던 야당의원들은 경찰과 군이 국회를 포위하고, 남송학(南松鶴) 의원 등 자유당합동파와 신라회 소장의원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가운데 1952 7 4일 밤 기립표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출석 166, 163, 기권 3명으로 발췌개헌안은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골자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의 도입이었다. 정부는 7 7일 제1차 개정헌법을 공포하였고, 이로써 부산정치파동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신동아, 2006 10월호 등 참고)

 

1952 7 4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의 헌법 개정 기립투표로 통과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