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5일

중국 문화혁명기 최초의 대자보 북경대학에 등장

산풀내음 2017. 4. 16. 15:00

1966 5 25,

중국 문화혁명기 최초의 대자보 북경대학에 등장

 

1966 5 25일 중국 북경대학 학생식당에 `송석, 육평, 등패운은 문화혁명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등장했다. 즉 마오쩌둥의 혁명에 반대하는 수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것이었다. 대자보의 첫 출현이었고 홍위병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다 되었다. 홍위병운동은 중국대륙 전역의 중고생과 교사 교수들은 물론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원돼 시위와 파괴활동을 벌이면서 마오의 정적들을 공격한 일종의 정치투쟁이었다. 송석은 북경시 당위원회 대학부 부장이었고 육평은 북경대학장 겸 북경대 당서기, 등패운은 북경대 당부서기였다.

 

학생들과 교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간부에 대한 비판은 독재권력을 장악한 `반당행위`여서 자살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자보 작성자는 좌파인 북경대 여성강사 녜위안쯔(聶元梓 녜위안쯔, 1921 - )였다. 녜위안쯔는 2001 8월 조선일보 박승준 특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모택동의 비서 강생의 직접 지시에 의해 대자보를 썼다고 실토했다.

 

 

대자보에 의해 매도당한 육평 등은 곧 반격에 나서 그날 중에 1천 매가 넘는 대자보를 대학구내에 빽빽하게 붙였다. 녜위안쯔는 당의 배신자 등으로 공격받아 위기에 처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6 1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녜위안쯔의 대자보가 중앙인민방송국 뉴스를 통해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대자보'로 평가 받은 것이다. 다음 날자 인민일보는 “환호를 보낸다”는 논평까지 곁들여 보도하고, 모택동은 “북경대학이라는 견고한 보루의 타파가 가능해졌다”며 대자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월 초에는 북경의 청화대학 부속중 교내에 “우리는 붉은 정권을 방위하는 위병(衛兵)이다”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문화혁명 기간 악명을 떨친 홍위병이 탄생한 것이다. 홍위병 조직이 금세 전국의 학교로 번져가는 것을 지켜본 모택동은 “무릇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뜻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내세워 홍위병과 학생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점차 전국의 학교 담벼락에는 부르주아 사상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넘쳐나고, 온갖 것이 권위주의적, 수정주의적이라며 규탄을 받았다. 학교는 수업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유소기는 문혁 급진파의 과격한 활동을 저지할 공작조를 구성하고 “대자보는 학내에만 붙일 것”, “가두에서의 데모 행진 금지” 등을 지시하는 한편 모택동에게는 사태 수습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대로 놔두면 좋지 않은가”라며 면전에서 거절했다.

 

육평과 팽패운은 곧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40여 명의 당 간부와 교사 등도 대학 내에서 몽둥이에 매달리는 굴욕을 당했다. 유소기가 조직한 공작조가 광란의 현장에 달려가 학대행위를 중지시키려 하자 홍위병들은 혁명을 억압한다며 반발했다.

 

녜위안쯔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총아로 떠올랐다. 북경대 문혁주임에 오르고 1966 8 18일 모택동이 백만 홍위병을 접견할 때 천안문 성루에 올라 모택동의 접견을 받았다. 8 5일 모택동의 그 유명한 ‘사령부를 폭격하라’라는 글에서는 “전국 첫 번째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대자보”라고 칭찬을 받았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했으나 거기까지였다. 2년 뒤인 1968년 모택동에게 버림받아 반혁명 죄목으로 8년간, 등소평 등장 후인 1980 '모택동의 앞잡이'라는 죄명으로 다시 8년간을 복역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역시 모택동의 음모에 놀아난 희생자였던 것이다16년을 복역한 뒤 1988년 출소한 그녀는 현재 언니의 손녀딸과 함께 베이징 시내에 거주하고 있다.

 

중국 최초의 대자보 붙인 녜위안쯔 (Premium Chosun, 2013. 12. 17)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17/2013121703406.html?related_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