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25일

장충당 집회 (야당주최 시국강연회) 방해 사건

산풀내음 2017. 4. 16. 14:52

1957 5 25,

장충당 집회 (야당주최 시국강연회) 방해 사건

 

1957 5월 25 제1공화국 자유당 독재를 성토하기 위해 야당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가 장충단 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고, 서울 시민 약 20여 만 명이 자유당에 대한 성토를 듣기 위하여 운집하였다. 오후 3시경에 민관식 의원의 사회로 연사순서가 알려지고, 전진한 의원의 연설이 이어졌다. 연단에는 장택상, 조병옥 의원이 참석했으며, 김두한 의원은 야당의 총경비책임자이었다.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조병옥이 지난 9년간의 이승만 정권 독재와 실정을 신랄하게 비난하자 청중 속 곳곳에서 파나마 모자에 검은 안경을 쓴 청년들이 "죽여라"하고 외치면서 연단을 향하여 돌과 유리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몽둥이를 든 조직폭력배 50여명이 연단 위로 뛰어올라와 책상을 뒤엎고 식순을 찢어버리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때 괴한 중 1명은 연단 옆 마이크 조정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연단에 있던 조병옥, 전진한, 장택상 의원 등은 김두한 의원의 경호로 연단 아래로 피신하였다. 경호를 맡은 김두한 의원 만이 괴한들과 몸싸움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경찰은 괴한들이 연단을 완전히 파괴하고 도망친지 한참 뒤에 나타났다.

 

민주당 조병옥 대표최고위원이 마이크를 잡자 강단 연하에 포진한 파나마 모자를 쓴 깡패들이 야유를 하고 있다.


최초의 조폭 전국구 두목인 김두한. 이승만 슬하를 떠나 야당에 합류한 순간 힘을 잃게 된다.

 

이 사건은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 의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 사건이 관심을 끈 것은 그 동안 정치집회에서 폭력을 휘둘렀던 '괴한'의 정체가 처음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깡패'란 용어는 해방 이후에 생겨난 신조어로, 영어의 'gang'과 무리를 낮춰 부르는 '패거리'가 합쳐진 말이다. 이들 깡패와 자유당 정권이 야합한 것은 1953년 중반 자유당이 이기붕을 중심으로 재편될 때였다.

 

이기붕은 당내 싸움이나 야당과 대결을 벌일 때 테러를 도입해 이승만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기붕은 대표적인 폭력조직인 동대문시장의 이정재와 접촉하기 시작했고, 정치적 야심을 가진 이정재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이렇게 해서 장충단 집회가 열리기 전 이기붕-이정재-유지광-행동대원으로 이어지는 명령체계가 선 것이다.

 

좌로부터 이기붕, 이정재, 유지광

이기붕(1896-1960)의 시신, 이승만의 똥개롤 살다가 일가족이 자살로 마감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 5 21일에 혁명재판에서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시내 한복판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는 이정재(1917-1961) 등 깡패들의 모습. 1961 10 19일 형장에서 처형.

5·16 군사정변 이후 재구속되었다.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신정식, 최인규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유지광은 처음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형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받고 5 6개월간 복역 중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국회가 시끄러워지고 여론이 악화되자 법무부의 명령에 따라 서울지방검찰청 조인구 검사가 단독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한편 동아일보에 실린 깡패들의 사진을 발췌하여 유지광을 비롯한 난동 깡패들의 실명을 밝힌 익명의 투고가 신문에 공개되었다. 이처럼 깡패들의 정체가 드러났는데도 수사는 벽에 부닥쳤다. 경찰이 노골적으로 범인 검거에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인구 검사는 검찰 수사과 직원 11명을 동원해 직접 용의자들 검거에 나섰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깡패들은 검찰이 출동하면 사전에 경찰의 연락을 받고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다.

 

이 와중에 서울시 경찰국 특수계가 1957 7 17 '폭력조직 분포도'를 발표했다. 이 분포도에는 이정재(동대문파)와 이화룡(명동파)을 두목으로 한 하부 조직의 계보가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폭력조직 보스와 자유당의 반발로 서울시 경찰국 특수계는 발표 후 일주일 만에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

 

유지광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이 찾아와 나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나아가 경찰 내부에서 나를 체포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귀띔했다. 동아일보에 내 사진이 공개된 이후 내 소재를 찾고 열심히 주변을 뒤진 것은 경찰이 아니라 신문기자들이었다. 경찰은 신문기자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줬다."

 

그러면 이 사건이 왜 오랫동안 정치쟁점화 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난 것일까? 테러를 당한 야당의원들의 과거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장충단 집회에서 연단에 오른 조병옥. 장택상. 전진한의 과거를 살펴보자. 모두 해방정국에서 우익청년단의 테러를 적극적으로 지시하고 활용했던 인물들이다. 조병옥은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장택상은 수도경찰청장으로 우익청년단의 피비린내 나는 테러를 비호했다. 조병옥은 "우익테러사건은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 방위적 입장에서 출발한 행동"이라는 담화까지 냈던 인물이다.

 

전진한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반공노동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후배인 유진산이 지휘하는 대한민주청년동맹, 청년조선총동맹과 제휴하여 좌익계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을 파괴하는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장충단 집회에서 테러를 당했던 이들 자신부터 이기붕 보다 앞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배들을 동원했던 전과가 있었으니, 큰 소리를 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1957 6 8일에 제25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집회방해행위를 경찰이 방치한 이유, 이 사건이 경찰의 배후조종 또는 묵인 하에 저질러진 것인지의 여부, 폭도들에 대한 수사가 지연되는 이유 등에 대하여 법무부장관과 내무부 장관에게 집중적으로 추궁하였다. 그러나 야당의 장택상 의원이 질의 도중 이승만 대통령을 식민지대통령이라고 지칭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여당이 징계동의를 발의하여 야당의원 전원이 퇴장한 채 표결을 강행하는 등 파동이 있었다.

 

서울지검은 그 배후관계는 규명하지 못하고 그 해 12월 30 유지광만을 재물손괴죄 등으로 구속 기소한 채 수사를 종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