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31일

이화학당(梨花學堂) 설립

산풀내음 2017. 4. 23. 08:20

18865 31,

이화학당(梨花學堂) 설립

 

이화학당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성교육기관이다. 창립 이후 이화학당은 유치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면서 발전하였으며 여성교육분야에 있어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애국열사 유관순도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평가에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은 미국 세계여성해외선교부(WFMS)가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 1885 6월에 아들 부부와 함께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스크랜턴은 조선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시급함을 깨닫고, 서울 정동(貞洞)에 학교 부지 6100여 평을 매입한 뒤 이듬해 2월부터 건물공사를 시작했다. 곧 학생모집에 나섰으나 교육을 받을 여성들은 여전히 집안 깊숙한 곳에서 나오질 않았다.

 

1886 5월 어느 날, 가마를 탄 한 여성이 하인을 거느리고 벽안(碧眼)의 스크랜턴 부인을 찾았다. 상류계층의 여성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고관의 소실로 결혼까지 한, 이름을 알 수 없어 김부인으로 불린 여성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1886 531, 김부인 한 명 만을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수업이 시작됐다.

 

근대적인 여성교육이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부인은 불행히도 병이 들어 석 달 만에 중도하차 해야 했다. 6월 말, 10살 난 꽃님이가 가난으로 딸을 부양할 수 없었던 엄마를 따라 이곳을 찾았고, 4살 난 별단이도 이곳에 보내졌다.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김정동(박에스더)이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11, 학수고대하던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 교사(校舍)가 완성되었다. 35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교실과 교사 숙소 등을 갖추었다. 1887년 학생 수가 7명으로 늘고, 1888 18, 그리고 1893 30명으로 늘었다. 이렇듯 학생들이 증가하자 1897년 기존의 한옥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당시로서는 최신 설비를 갖춘 서구식 2층 건물인 메인홀을 착공하였다.

 

초기 기와집 교사

메인홀 전경

 

18872월에는 고종황제가이화학당(梨花學堂)’ 이란 교명(校名)을 하사했다. 정동에 배밭이 많아이화(梨花)’ 로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화여대는 1935년에 화빈궁(정조의 후궁)의 묘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신촌시대를 열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마침내 보통·중등·고등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가 중등과를 먼저 설치한 것은 이화의 교육이 여성의 고등교육을 지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은 1908 6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4년제의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 4월 신마실라, 이화숙, 김애식 등 한국 최초의 여대생을 배출하였다.

 

아울러 1914년에 이화유치원을, 1915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차례로 신설하고, 1917년에는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편하였다. 또한 191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로 분립개교하였고, 1925년에 대학과와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28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였다. 이렇듯 이화학당 내에 있던 각급 교육기관들이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독립된 학제로 운영됨에 따라 1928년에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나, 친근하고 익숙한 ‘학당’이란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

 

1922년 고등보통과 교실

매일신보 1914년 이화학당 탐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