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31일

70명의 여인을 간음한 혐의로 카사노바 박인수 검거

산풀내음 2017. 4. 23. 08:27

19555 31,

70명의 여인을 간음한 혐의로 카사노바 박인수 검거

 

1년간 70여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로 박인수씨가 1955 531일에 검거됐다. 중학을 중퇴하고 전쟁 발발로 입대했던 훤칠한 미청년 박인수는 해병대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해군장교구락부(LCI),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 홀을 드나들다. 비록 사병이었지만 헌병은 힘있는 자리였다. 이런 그에게 깊은 자존심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생겼으니 애인으로부터 실연을 당한 것이었다. 박인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이에 여자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1954년 제대한 이후 해군 대위를 사칭, 인기 댄스홀을 휩쓸며 여성 편력을 펼친 것이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6cm 인 신체 조건에 귀공자다운 얼굴, 여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탁웛한 춤 실력에 남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솜씨까지 있었다. 1년 동안 농락한 여성 만 100명이 넘었고, 법정에 피해자로 알려진 여성만 69명 이었다.

 

이 사건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박인수가 만난 여성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도 많았다는 사실과 그의 여성 편력도 편력이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박인수에게 넘어갔다는 사실마저 커다란 화제가 됐다. 판사에게는 이색적인 편지가 쏟아졌다. “정조는 아니고 키스만 빼앗겼는데 그만 병을 얻어 몸져 누웠으니 엄벌에 처해달라”는 여자의 편지, “딸이 증언대에 서면 자살할지 모르니 선처 바란다”는 어머니의 탄원, “기소장에는 우리 친구가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12명의 여자 동기들의 연판장까지.

 

검찰은 박을 혼인빙자 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이 죄는 친고죄. 박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둘 뿐이었으며, 그나마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여성은 네댓밖에 안됐다. 하지만 공판날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됐다. 무려 7천 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장사진을 쳤고, 기마경찰대까지 출동하여 질서를 잡으려 했지만 아우성을 치는 군중에 결국 판사는 공판을 연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공판에서 검사는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하자, 박인수는 이를 강하게 부인한다.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권순영 판사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판결을 내린다.

공무원 사칭죄는 유죄를 인정하면서 혼인빙자간음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였고 “댄스홀에서 만난 정도의 일시적 기분으로 성교 관계가 있었을 경우 혼인이라는 언사를 믿었다기보다 여자 자신이 택한 향락의 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법은 보호 가치가 있는 정조를 보호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박인수 피고에게 공무원 자격 사칭에 대해서만 2만 환의 벌금형을 과했다.

남녀관계에서 ‘가해자는 항상 남자요,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천년의 공식이 깨진 것이다. 여성의 순결과 정조에 관해 도덕의 색안경을 벗은 현대적(?) 판결이 내려진 거다.

 

그러나 세간은 떠들썩했고 검찰은 항고했다. 항소심에서 박인수는 징역 1년 형을 받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고의로 여자를 여관에 유인하는 남성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는 게 유죄 판결 이유였다.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던 1950년대 한국의 웃지 못할 풍속화다. 자유로워진 성 풍속도, 그러나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던 윤리의 이중 잣대, 미군 문화를 통해 전파된 춤 바람과 댄스홀, 이 모든 새로운 사회문화 코드의 조합이 박인수 사건으로 응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