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31일

2002 한일월드컵 개막

산풀내음 2017. 4. 23. 08:46

20025 31,

2002 한일월드컵 개막

 

지구촌 최대의 축제, 21세기 첫 축구제전인 2002 한일월드컵 축구대회가 2002 5 31일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이는 월드컵 사상 첫 아시아 개최이고 2개의 나라에서 공동 개최한 유일한 대회였다. 17회를 맞은 이번 월드컵은 오후 8 30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지난 1998년 대회 우승팀 프랑스와 세네갈의 경기를 시작으로 킥오프, 31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1) 월드컵 유치까지의 힘든 여정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치고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땄을 때 대한민국은 환호했고 열광했다. 일본을 상대한 표 대결에서 압도적인 승리(서울 52-27 나고야)를 거뒀다. 한국이 서울 올림픽의 감동에 취해 있던 1988년 일본은 2002년 월드컵 유치 준비에 들어갔다. 1990년엔 월드컵 준비단을 발족시켜 올림픽 개최 실패의 아픔을 씻으려 했다.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었던 주앙 아벨란제(89·브라질) 역시 공개적으로 일본의 월드컵 개최를 지지하고 나서 일본이 아시아의 첫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한국은 월드컵 개최에 대해 이렇다 할 계획이나 마음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1993년 정몽준씨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정몽준 회장은 1993년 모두가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월드컵 유치 경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한국은 6년이나 앞섰던 일본을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기 시작했다. 1994 5 FIFA 부회장으로 취임한 정몽준 회장의 외교력과 한국 유치 홍보단의 눈물겨운 홍보 활동의 결과였다. 여기에 FIFA '반 아벨란제'의 성향을 띤 유럽축구연맹(UEFA)이 한국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주앙 아벨란제(Jean-Marie Faustin Goedefroid de Havelange, 1916-2016) FIFA회장

 

상황이 이렇게 바뀌면서 일본 쪽으로 기울었던 월드컵 개최권은 치열한 경쟁 양상으로 바뀌었다. 1994년 말 일본의 고노 요헤이 외상이 도쿄를 방문한 한승주 당시 외교부 장관과의 만찬 자리에서 처음 공동 개최론을 꺼냈다. 과열되는 유치 경쟁으로 어느 한쪽이 피해를 입는 것을 막아보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일본은 곧 공동 개최 입장을 철회했다. 그 이면엔 아벨란제 회장과 블레터 사무총장( FIFA 회장)의 입김이 있었다. 일본의 승리를 장담했던 것이다.

 

1994년에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한 대한민국은 1995년에 일본과 함께 FIFA월드컵 개최 제안서를 제출한다. 펠레브라질의 우방인 일본의 개최를 강력히 희망했는데 마라도나는 단순히 펠레가 일본편을 들었기 때문에 대한민국편을 들었다. 마라도나는 2002년 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1995, 보카 후니오르스 초청)에 출전했다. 그 경기는 마라도나가 1994 미국 월드컵, 약물 복용으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 첫번째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경기였다.

 

치열한 유치 경쟁이 계속되던 1996 3월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인 술탄 아마드 샤가 정식으로 공동개최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벨란제 회장이 자신의 이름으로 이를 거부했다. 이같은 아벨란제 회장의 노골적인 일본 밀어주기에 폭발한 UEFA '공동 개최'를 결의안으로 채택하고 이를 묵살할 경우 한국에 표를 몰아주겠다는 강경 노선을 택했다. 위기를 느낀 아벨란제 회장과 블레터 사무총장은 당시 취리히에 와있던 일본의 미야자와 전 총리에게 공동 개최 수락을 종용했다. 결국 1996 5 31일 한일 양국의 합의하에 역사적인 첫 '월드컵 공동 개최'가 성사됐다.

 

1996 5 3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2002한일공동개최가 확정된 뒤 나가누마 켄 당시 일본축구협회장과 정몽준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이 함께 월드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주앙 아벨란제 국제축구연맹회장은 1996 5 31일 밤 11시 스위스 취리히 돌더 그랜드호텔서 요한슨 유럽축구연맹회장 및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등 부회장단,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 사무총장, 나가누마 겐 일본축구협회회장 등 FIFA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집행위원회는 한일공동개최안을 놓고 토론을 벌인 결과 표결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발표했다.

 

 

 

2) 명칭 문제

 

본래는 2002 FIFA World Cup Japan/Korea이었다. 이에 정몽준 일본이 대한민국 앞에 오냐며 항의했고 제프 블라터 당시 FIFA 사무총장은 J K보다 먼저 와서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정몽준은 프랑스어로는 한국을 Corea라고 표기하며 FIFA(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는 프랑스어를 사용한 단체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Korea/Japan으로 정정되었다.

 

사실 결승전을 일본에 넘기는 대신 명칭을 Korea/Japan으로 표기하는 것을 사전에 일본과 협의했다. 그러나 대회를 앞두고 일본이 임의적으로 협약된 명칭을 어기고 Japan을 앞에 두기 시작하자 사전 협의를 이행할 것을 한국측이 촉구. 그 과정에서 정몽준이 협의사항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정몽준은 Japan을 앞에 두려면 결승전을 포기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일본은 대회기간 동안은 가급적 공식적인 Korea/Japan의 표기를 사용했다.

 

 

 

3) 지역 예선

 

예선 조 추첨이 있었던 1999부터 199개 팀이 2002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예선에 참여하였다. 이 중 29장의 티켓이 그들에게 배분되었으며, 나머지 3장은 개최국이었던 대한민국일본이 각각 한 장씩, 그리고 전 대회 우승국 자동 진출권을 획득한 프랑스의 몫이 되었다. 전 대회 우승국의 자동 진출권은 이 대회가 마지막으로, 다음 대회부터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우승했으나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다음 대회지역 예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유럽 축구 연맹에는 14장의 티켓이(전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 포함),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는 5장의 티켓이, 남미 축구 연맹에는 4장의 티켓이, 아시아 축구 연맹에는 4장의 티켓이(개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 포함),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에는 3장의 티켓이 각각 배분되었으며, 남은 두 장의 티켓은 대륙간 플레이오프(아시아 와 유럽, 남미와 오세아니아)를 통해 배분되었다. 4개의 팀이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에콰도르, 세네갈, 슬로베니아가 그들이다.

 

 

4) 조 추첨

 

2001 12 1부산 벡스코에서 월드컵 조 추첨행사가 열렸다. 13명의 조 추첨자가 선정되었으며, 한국 측 인사로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월드컵 국가대표 홍명보 선수, 바둑기사 조훈현 9, 산악인 박영석, 탤런트 송혜교, 국제심판 임은주 6명이 선정되었고, 일본에서는 오카노 순이치로 일본축구협회장과 프랑스월드컵때 일본 주장으로 활약했던 이하라 마사미 등 2명으로 결정되었다. 나머지 5명의 인원들은 대륙별 안배원칙에 따라 브라질 축구황제 펠레, 네덜란드요한 크루이프, 카메룬로저 밀라, 중국의 여자 축구스타 쑨웬, 프랑스 월드컵 공동위원장을 역임한 미셀 플라티니가 선정되었다.

 

A ~ D조는 대한민국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E ~ H조는 일본에서 경기를 치르게 됨에 따라 대한민국은 자동으로 D 1번째에 배정되었고 일본 H 1번째에 배정되었다. 지난 월드컵 개최국이자 우승국인 프랑스는 우승국 자격에 따라 A 1번째에 배정되었다.

 

 

 

5) 지구촌의 축제, 2002 한일월드컵

 

60억 지구촌 사람들의 친구로 500g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공 하나에 울고 웃었던 월드컵은 지난 70여 년의 시간을 발판 삼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가운데 21세기와 2000년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2002 World-cup Opening Ceremany

 

 

17FIFA 월드컵2002 5월 31부터 6월 30까지 열렸다.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슬로건으로 하였으며, 대한민국일본에서 각각 10, 20개의 도시에서 31일 간 64경기를 치렀다.

 

2년여 동안 치열한 지역예선을 거친 본선 진출 32개국은 8개조로 나뉘어 조별 리그전을 벌였다.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은 이변의 전주곡이었다. FIFA 랭킹 42위 세네갈이 1위인 프랑스를 10으로 침몰시켰기 때문이다.

 

브라질이 우승하였고, 독일이 준우승하였다. 터키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 3위까지 올랐고, 세네갈 역시 월드컵에 처음 출전해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를 꺾는 파란을 일으킨 데 이어 16강전에서 스웨덴까지 누르고 8강에 올랐다. 개최국인 대한민국일본도 이 대회에서 각각 4, 16강 진출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특히 한국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전부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종합전적 322패로 4위에 올라 전국민을 흥분시켰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가 조별리그에서 1승은 커녕 무득점으로 탈락했다.

 

한국에서의 개막식은동방으로부터(From the East)’라는 주제로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고, 상생의 정신을 표현해 전세계 시청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모두가 ‘이변은 단지 이변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은 아프리카 ‘테랑가의 사자’ 세네갈에 2002월드컵축구 개막전 승리의 축복을 내렸다. 모국 프랑스를 이긴 브뤼노 메추 세네갈 감독은 경기 직후 양팔을 번쩍 치켜들고 그라운드로 걸어나가 전사들을 맞았고 본부석 오른쪽 스탠드를 가득 메운 세네갈 응원단은 흩뿌리는 빗물 속에 기쁨의 눈물을 보탰다.



 

 

6) 재미난 뒤 이야기들

 

6 4일 폴란드전 70만 명, 10일 미국전 100만 명, 14일 포르투갈전 350만 명, 18일 이탈리아전 500만 명, 22일 스페인전 600만 명, 그리고 25일 독일전 650만 명.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2002년의 한국은 붉게 물들었다.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은 붉은 옷을 입은 '붉은악마'들로 가득했으며 47백만 국민의 30%에 이르는 1 3백만여 명이 한번쯤은 거리 응원에 참가했다.

 

전 세계 외신과 축구팬들은 한국의 놀라운 승리와 더불어 더 놀라운 거리의 '붉은 물결'에 경외감을 나타냈고, 이는 가장 월드컵답고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세계인들의 가슴에 각인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서포터즈 클럽인 붉은 악마(Red Devils)가 유명해졌다. 2002년 당시에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 특히 매 경기마다 펼친 카드섹션 퍼포먼스가 매우 화제가 되었다. 각 경기 별 카드 섹션 문구는 다음과 같다. 폴란드전 : WIN 3:0 , 미국전 : GO! KOR 16!, 포르투갈전 : 대한민국, 이탈리아전 : AGAIN 1966, 스페인전 : PRIDE OF ASIA, 독일전 : 은 이루어진다, 터키전 : CU@K-리그

 


 

한국, 유럽강호 폴란드에 20 . 월드컵 출전 48년만의 첫 승. 한국이 2002 6 4일 부산에서 벌어진 2002한일월드컵 축구대회 D조 첫 경기에서 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시종 압도한 끝에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로 20 쾌승을 거뒀다. 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 여섯 차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노크한 끝에 거둔 첫 승리였다. 한국은 역대 410패의 치욕적 월드컵 성적표에 드디어 1승을 보탰다.


부산 주경기장은 경기시작 6시간 전부터 관중들이 몰려들기 시작, 경기개시 휘슬이 울릴 때쯤엔 이미 열광의 도가니였다. 붉은 옷 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전반 초반 폴란드의 거센 공세에 잠시 주춤했던 한국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은 최종 수비 홍명보가 상대 진영 깊숙이 침투하는 등 총력 공세를 폈다.

 

전반 26분 드디어 기다리던 골이 터졌다. 이을용이 왼쪽에서 강하게 밀어준 볼에 황선홍이 가볍게 왼발을 갖다 댄 것. 월드컵 1승과 16강 진출의 염원을 담은 이 슈팅은 여지없이 폴란드 골대를 갈랐다. 한국은 후반 8분 유상철이 아크 정면에서 통렬한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려 다시 한번 골대를 흔들었다. 사실상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우승을 목표로 내세우며 한국과 일본 땅을 밟았던 세계의 축구 강국들은 1라운드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며 쓸쓸히 고국 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A조에 속한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는 세네갈에 개막전 패배를 당하며 1 2패 무득점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며 탈락했다. 죽음의 F조에 속했던 아르헨티나도 스웨덴과 잉글랜드에 가로막혀 16강행이 좌절됐다또 포르투갈은 한국에 덜미가 잡혀 1라운드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우승후보로 평가 받던 나라가 줄줄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자 월드컵의 ''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드라마와 같은 연승 행진과 브라질의 5회 우승을 향한 쾌속 질주로 이 같은 우려는 곧 사라졌다.

 

 

6 2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에서의 3, 4위전에서는 터키와 맞붙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진 형제의 나라 이야기에 힘입어 관중석에서 대형 터키 국기를 내걸어 주기도 했다. 실제로 터키 현지에서는 한국 응원단의 이런 호의에 많은 터키인들이 감동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겐 뼈 아픈 기록이 이 경기에서 수록되었다. 한국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반 휘슬이 울리기가 무섭게 터키의 하칸 수쿠루가 한국 진영으로 돌진했고 홍명보는 자신에게 연결된 공을 제대로 트래핑하지 못하면서 하칸 수쿠르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칸 수쿠르는 골키퍼 이운재 옆으로 침착하게 밀어 넣었다. 월드컵 역사상 최단 시간 골(10. 8)이었다. 종전 기록은 15초로 1962년 칠레 대회에서 나왔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바끌레프 마세크가 기록했다.


 

 

3국 간의 경기에서 한국 관중들과 일본 관중들의 태도가 대조적이었는데, 한국 관중들은 주로 강팀보다는 약팀을 응원, 그것도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공정하게 응원하는 반면, 일본은 무조건 강팀과 인기팀 위주로 일방적인 응원을 했다. 특히 일본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브라질 경기를 보면 일본인지 유럽이나 남미인지 헷갈릴 정도인데 세네갈은 16강전을 일본에서 치렀는데, 한국에서 조예선을 할 당시 한국인들이 세네갈 국기를 흔들고 세네갈 극소수 관중들과 어울려 세네갈을 응원해줘서 일본도 그러겠지 여겼더니만 그런 거 없고 죄다 스웨덴만 응원해서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한국 측에 부탁하여 응원도구와 몇몇 물품을 일본으로 공수해주기도 했다.

 



 

스페인 대표팀은 월드컵 기간 중에 한국 토종개를 길렀다. 시장에서 멍멍탕이 될 운명에 처한 강아지를 보고 가엾게 여긴 스페인 기자가 1만원을 주고 구해왔으며,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의 이름을 따서 '카마친(작은 카마초)'이라고 불렸다. 카마친은 스페인 선수들에게 몹시 사랑 받았지만, 비행기 검역에 걸려서 선수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못 데려갔다고 한다. 카마친에게 정이 들었던 카시야스는 공항에서 헤어질 때 눈물을 글썽였고, 라울은 잘 돌봐주라며 거금을 주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