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21일

김대중 대통령 2남 김홍업씨 22억 수수혐의로 구속

산풀내음 2017. 5. 13. 06:14

2002 6 21,

김대중 대통령 2남 김홍업씨 22억 수수혐의로 구속

 

1998년 초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홍일, 홍업, 홍걸 세 아들을 일산 자택으로 불러들여 앞으로의 처신을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현철씨 문제로 곤욕을 치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말을 보아온 터라 김 당선자는 아들들의 처신에 거듭 주의를 준 것으로 당시 언론들은 전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아태평화재단 관계자들과의 만찬장에서도 김 대통령은 "대통령 아들들은 수신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재단 상임부이사장직을 맡은 홍업을 염두에 둔 말이다. 국회의원으로 이미 공인이 된 장남 홍일과 미국 유학중인 막내 홍걸과는 달리 '밝은 세상'이라는 정치기획사를 만들어 대선에까지 개입했으며 아태재단을 관리하던 홍업에게 김 대통령의 이 같은 당부는 간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 재직 중인 2002 6 21일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은 청와대, 검찰, 국세청, 예금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 등 국가기관의 업무와 관련해 기업체의 청탁과 함께 228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알선수재, 변호사법 위반)로 구속됐다.

 

 

검찰에 따르면 홍업은 2000 2월 삼보판지 유종규 부사장으로부터 모범납세자로 선정되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국세청 간부에게 청탁해주겠다며 1억원이 든 통장을 받았고, 같은 해 9월∼2002 2월 성원건설 전윤수 회장으로부터 화의 인가와 관련한 청탁조 및 사례비조로 4차례에 걸쳐 14000만원을 받았다. 홍업은 또 2000 6월 당시 대한주택공사 오시덕 사장에 대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내사종결 사례비로 오 사장으로부터 2000만원을 받는 등 총 26000만원을 직접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김홍업은 1950년 전남 목포 출생. 경희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경영학과로 옮겨 1972년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장교(ROTC 10)로 복무했으며, 감사원 감사위원을 지낸 신현수씨의 딸 신선련씨와 1984년 워싱턴에서 결혼해 2남을 뒀다. 부인도 경희대 동문이다. 장교 전역 후 부친의 수행비서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고 줄곧 정치권 주변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1980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치도곤도 당했고, 김 대통령의 미국 망명시절에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는 '평화기획'이라는 정치광고 대행사를 만들어 선거에 직접 개입했다. 그리고 1995 '평화기획'이 모태가 된 정치기획사 '밝은 세상'을 설립 운영하면서 정치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 후에는 아태재단 부이사장이라는 공식직함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공식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부친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기여도를 봤을 때, 한때 홍업씨의 정치권 진출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김홍업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동교동 사금고'라는 별칭이 붙어 있던 아태평화재단에 대한 검찰 수사 이후 각종 비리의 몸통으로 지목되면서부터다. 당초 아태재단은 19941월 김 대통령의 외교 및 대북정책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 김 대통령은 이사장직을 사임했고, 이후부터 김홍업이 부이사장으로써 실질적인 관리하였으며, 재단 실무는 사무총장과 상임이사에게 거의 일임했으나 후원금 및 운영자금 문제 등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했으며 적지 않은 후원금을 유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세 아들 홍일, 홍업, 홍걸씨는 부자지간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동지로서 고난과 영광을 함께 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과 연금 등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어려워진 집안을 이끌었고 `DJ의 아들'이란 이유로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을 때도 지근 거리에서 아버지를 도와 훗날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장남 김홍일은 아버지가 대선에 출마해 박정희와 맞섰던 1971년에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고 1980년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동생 홀업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엄청난 고초를 겪었고, 비록 15,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지난 시절 고문 등의 여파로 현재 파킨슨병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다. 막내 김홍걸은 형 들과 달리 일찍이 미국에서 머물며 `민주투사'였던 두 형과는 다른 삶을 살았지만 고교생 때인 1980년 아버지의 구속과 사형언도를 지켜봐야 하는 등 어릴 적부터 마음고생이 심했다.

 

꿈만 같았던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세 아들의 신분은 탄압받는 야당 지도자의 아들에서 `대통령의 아들'로 신분이 격상됐지만 이번에는 대통령 주위에서 이들을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막내 홍걸도 홍업에 앞서 2002 5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 39 9000만원의 노물을 수수하고 2 2000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장남인 홍일도 2003 '나라종금 로비' 수사과정에서 1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었다.

 

김홍일은 2006 9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추징금 1 5000만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김홍업은 2003 5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벌금 4억원, 추징금 2 6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구속 수감되었다. 구속 수감중 우울증 등 건강문제를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풀려난 뒤 수차례 형집행정지를 연장하던 도중 2005 8월 대통령 특별사면 조치로 잔여형기를 남겨둔채 '특혜시비' 끝에 가석방, 사면복권되었다. 김홍걸은 징역 1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어 수형생활 반년만에 풀려나옴으로써 당시 엄청난 형평성 논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