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30일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원리 완성

산풀내음 2017. 5. 23. 20:34

1905 6 30,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원리 완성

 

 

1905 630일 스위스 베른에서 약관 26세의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최대의 업적으로 된 논문을 완성했다. 이른바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소개로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했다.

 

3월에는 광양자(光量子)에 관한 논문, 5월에는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 게다가 이날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이 논문이 9월에 물리학연보지에 발표되자 일부 전문가들은 격찬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불평을 샀다. 1915년 이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했고 그 실용성은 40년 후에 원자에너지로 현실화됐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3월 14 ~ 1955 4월 18)독일 울름에서 전기 회사 사장이었던 유대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1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두 살 아래인 여동생 마야(Maja)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은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가 다닌 초등학교는 로마 가톨릭 학교였는데, 교사가 수업 시간에 대못을 보여 주며,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아인슈타인이 존경 받는 과학자가 된 후에도 그를 괴롭혔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서너 달 간격으로 발표한 논문이 세 개 있고, 같은 해에 ETH Zurich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참고로 그 세 가지 각 논문의 주제는 광양자 가설, 특수상대성 이론, 브라운 운동인데 이 세 편의 논문은 아이작 뉴턴으로 대표되던 근대의 물리학을 뒤엎으면서 천지개벽을 일으켰고, 그 각 논문은 현대 물리학의 주요 테마인 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통계 역학의 시초가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는 학교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물리학 연구를 한 것이었다.

 

이후 특수 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점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도입하여 중력을 포함한 이론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특허 사무소를 떠나서 학계로 입성한 그는 스위스에서 그리고 프라하와 독일의 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 겨울에 모교인 ETH 취리히의 교수로 돌아왔다.

 

1919 런던 왕립 학회는 기니 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관측에서 그 해 5 29일의 일식을 촬영하였는데, 일반 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이 검증되었다고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고전역학적 세계관을 마감한 인물로서 범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21에는 광전 효과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상대성 이론은 당시 여러 가지로 논란이 많아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광전효과로 노벨 물리학상을 주었다고 한다.

 

1932 12 10, 아인슈타인과 부인 엘자는 독일을 영원히 떠났다. 아인슈타인과 부인 엘자는 1932 12 10일 독일의 브레머하벤 항구를 출발해서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둘러본 후 다시 독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아인슈타인은 두려웠다. 나치당이 권력을 거머쥐면서 유대인들이 독일을 도망쳐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을 떠나면서 아인슈타인은 엘자에게 “주위를 둘러보시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 부부는 결코 독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4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이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교수로 지냈다.

 

아인슈타인을 관념적인 물리학자로만 알고 있으나, 그는 열렬한 인도주의자이고 반전 운동가이기도 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난 그는 진실로 자신을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반전 활공과 인종차별 철폐, 그리고 반유대주의 타도와 핵 감축에 이르는 세계적인 논쟁에 대해 거침없는 의견을 토로했다. 아인슈타인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은 어떤 사람의 관심도 끌지 못할 만큼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편지와 메모와 원고는 그가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1939 8월에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던 핵무기 연구에 위험성을 느꼈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보유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는 실라르드의 서한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을 지켜본 이후 그는 당시 서한에 서명한 것을 평생 후회하며,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라는 말을 남겼고, 핵무기 폐지를 위해 남은 일생을 바쳤다. 특히 1955년 영국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과 대대적인 핵군축과 평화를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이 계기가 되어 전세계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군축과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불가지론자였다. 특히 확률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인격신, 유대교기독교 세계관의 야훼를 부정하였으며, 자유의지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지 않았고, 생명체의 사고는 주로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생전에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을 상상할 수가 없다. 또한 나는 물리적인 죽음을 경험하고도 살아남는 사람이란 것을 상상할 수도 없으며, 믿고 싶지도 않다. 유약한 영혼들이 두려움이나 터무니없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진 나머지 그런 사고를 전도한다. 나는 삶의 영원성이 미스터리로 남은 지금 그 대로에, 그리고 내가 현 세계의 놀라운 구조를 엿볼 수 있음에 만족하며, 또한 비록 작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자연에 스스로를 채화한 이성의 일부를 이해하는 데 내가 전력투구해온 삶에 만족한다.”


- 아인슈타인, "Mein Weltbild" (1931) -

 

또한 1954에 아인슈타인이 철학자 에릭 구트킨트(Eric Gutkind)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혀있다.

 

내게 신이라고 하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이나 산물에 불과하다. 성서는 명예롭지만 꽤나 유치하고 원시적인 전설들의 집대성이며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 아인슈타인, 1954 1 3일의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