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 방북

산풀내음 2017. 5. 23. 21:02

1989 6 30,

전대협 대표 임수경 방북

 

북한은 1989 7 1일로 예정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에서 조선(북한)적십자사로 그리고 다시 대한적십자사와 통일원(현 통일부)를 거쳐 전대협의 경로로 전달되고 전대협은 축전 참가를 준비한다.

 

당시 공산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주장한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1988)으로 남북대화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더구나 한정적이지만 민주화의 성공과 맞물린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가 몰래 입북해서 김일성과 포옹까지 하는 상황에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고, 1989 6 6일에는 문교부 장관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불허한다.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그러나 전대협은 밀입북 하기를 결정한다. 임수경은 일본-서독-동독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했다. 6 21일 임수경은 도쿄로 출발해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른 뒤, 서베를린으로 갔다. 이후 동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간 다음에 평양으로 출발, 9일 만인 6 30일 오후 1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에 남한 인사의 방문으로 즐거워하던 북한 입장에서도 임수경의 방북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격이었다. 나이 지긋한 남자가 아니라 평범한 여대성의 모습에 관심이 집중된다. 살벌한 사회통제가 당연시 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동원하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모조리 마비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북한은 임수경을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고 하였지만 임수경은 북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수경의 돌출행동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처음에 와서 한 말이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였고 사람들만 모이면 원고 없이 즉석 연설을 하는 등 통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급인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컴퓨터를 보고는 ",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네?”라는 표현으로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주었다. 북의 학생들이 선물해준 스카프도 버리고, 집단체조 관람 중에 퇴장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문도 '다른 행사도 있는데 거긴 왜 가요?'라고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뜻을 보인걸 북측 실무자들이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방문했다고 한다.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려고 난리치고 환호하고,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종종 노래해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전대협진군가> 같은걸 불렀다고 한다.

 




 

임수경은 북한의 청년들과 통일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를 지지하고 임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하였다.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한다. 이것도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는데 단식투쟁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귀환 이후에는 안기부로 가서 조사를 받은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 받고 3 5개월간 복역 후 1992 1224일 가석방되었다.

 


 

임수경은 1968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서울지하철공사 간부로, 집에 컴퓨터가 있었을 정도니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임수경은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불어과에 입학한 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89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민간통일운동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개최된 제13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한반도 군사 분계선이 가로막힌 이후 공개적으로 휴전선을 걸어서 넘은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통일의 꽃'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2012 4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임수경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미국에 대한 시각, 북한사회를 보는 시각, 김일성에 대한 시각, 주사파에 대한 시각을 자필진술로 작성, 견해를 밝혔다. 그는 미국에 대해해방자, 구원자의 탈을 쓰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금까지 우리의 영원한 우방국가처럼 존재하고 있으나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아니며 해방자, 구원자는 더더욱 아닌 우리의 침략자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김일성에 대해일제시대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중 한 사람이며 일제에 반대하여 조국광복을 되찾고자 했던 조선독립군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싸웠던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였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북한의 최고지도자"라고 말하며 "북한의 주민들은 그들 중심으로 단결, 생활하고 있으며 해방, 6.25 이후 거의 폐허가 된 북의 지역을 새로이 건설하는데 있어서 또 지금의 생활을 유지,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필요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2 6월 한 술좌석에서 탈북자들과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등을 '변절자'라고 비하한 것이 논란이 일었다. 그녀는 탈북자 대학생에게 ,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까불지 마라.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들이 굴러 와서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겨? 너 그 하태경 하고 북한 인권인지 하는 이상한 짓 하고 있다지? 하태경 그 변절자 ××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하태경 그 개××, 진짜 변절자 ××. 개념 없는 탈북자 ××들이 어디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개기는 거야.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아. 이 변절자 ××들아. 너 몸 조심해.” 라고 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