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30일

리지웨이, 원산만 덴마크 함상에서의 휴전회담 제의

산풀내음 2017. 5. 23. 20:46

1951 6 30,

리지웨이, 원산만 덴마크 함상에서의 휴전회담 제의

 

1년 이상 계속되어 오던 한국전쟁이 1951 627일 마리크 주 유엔 소련대사의 정전회담 제의로 휴정협상에 대한 논의가 공식화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도 소련의 제의에 동의하자 이틀 뒤인 6 2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1895 3월 3 ~ 1993 7월 26)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교섭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30일 리지웨이는 공산군측에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군함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하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는 7 1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이에 따라 휴전예비회담이 7 8, 본 회담이 7 10일부터 개성에서 개최됐다. 회담장소는 약 3개월 뒤인 10 7일 안전상의 이유로 판문점으로 변경됐다.

 

1951 7 10,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출발하기 전 헬리콥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유엔 측 대표들,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지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수석대표(해군 중장)와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육군 소장.


1953 7 27일까지 판문점에서 2 2개월 동안 북한을 대변했던 사람들이다. 왼쪽부터 중국 대표인 세팡(解方) 소장, 덩화(鄧華) 상장, 가운데가 북한대표인 남일 대장, 오른쪽이 이상조 소장, 그 오른쪽은 장평산 대좌.

남일장군(가운데) 70년대 초반 김정일 권력세습을 반대하다 숙청돼 사망했고, 이상조 소장(남일장군 바로 우측) 1956년 소련대사로 부임후 사실상 망명했다. 제일우측의 장평산 1958년 구테타음모를 뒤집어 쓰고 김일성에 의해 사형당했다.

1951 7 10일 지프에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 측 대표단. 백기를 다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지만 공산군 측의 유엔군 측을 항복사절로 선전했다.

휴전회담 첫 날의 모습.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발발 1 15일 만에 휴전협상을 시작했으나 남한정부와 국민들의 휴전반대 데모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 17일이 지난 1953 7 27일에 협정이 조인됐다.

 

Major General Blackshear M. Bryan, left, exchanged credentials with North Korean Lt. General Lee Sang Cho at the opening session of the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July 27, 1953.

1953 7 27일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왼쪽)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오른쪽)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 공산정권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 하에 전 한반도를 공산화한다는 목표로 1950 6 25일 남침을 자행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이에 한국을 지원하여 자유진영의 유엔군이 참전하고, 뒤따라 공산진영의 중공과 소련(공군)이 북한을 지원하여 직접 개입하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전쟁으로부터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선에서 전쟁을 중단시키려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공산군의 반대로 유엔의 제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먼저, 1950 6 25일 북한이 남침을 자행하자 유엔은 결의를 통해 북한이 침략을 중지하고 즉각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한 1950 12월에는 유엔총회가 ‘정전 3인위원회’를 설치하여 중공에 대해 38도선 이남으로 침공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등 한반도에서 평화를 회복하려 노력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1950 10월 초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 패주할 때 38도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외국군 즉각 철수’등의 불합리한 조건을 달고 있어 유엔군 측이 수용할 수 없었다.

 

해가 바뀌어 1951년 초에 접어들어서도 유엔의 평화회복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3월 하순 유엔군이 38도선을 회복할 무렵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직접 공산군사령관 팽덕회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하였으나 이 역시 묵살되었다.

쌍방은 1951 45, 이른바 중공군의 춘계공세에서 개전 이후 최대의 결전을 치렀다. 여기에서 피아 모두 최악의 인명손실을 입은 후에야 무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양측 모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국이 주도한 미·소의 막후 접촉에서 소련이 “전쟁 전 현상에서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한다”는 데 호응해 옴으로써 마침내 휴전협상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끝난 1951 6, 전선은 또다시 38도선 부근으로 회귀하였고 그 후 교착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춘계공세에서의 실패와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재기불능의 손실을 입어 더 이상의 공세가 거의 불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쌍방은 기존 정책과는 달리 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교착된 전선에서 휴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측에서는 유엔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미국이 전쟁 이전 상황에서의 휴전정책을 확정한 데 이어 공산국 측에서도 소련이 중심이 되어 1951 6 13일 모스크바 조·중·소 회담에서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측의 협상 목적과 목표는 각기 달랐다. 유엔군 측은 군사협상을 통해 일단 휴전한 다음 유엔기구를 통해 정치적 수단에 의한 통일 민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반면 공산군도 전선이 교착된 6월부터 방어태세를 취하면서 지상군의 정비와 공군력의 전개를 통해 전력을 회복한 다음 8월 이후에 공세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고, 이 기간 중에 휴전회담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여건을 마련하기에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이 선정한 6.25전쟁 4대 영웅은 맥아더장군, 리지웨이장군, 백선엽장군, 그리고 북파공작원의 대부 김동석 대령이다. 이 가운데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 대공세 시기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장군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유엔군의 붕괴를 막고 서울을 재탈환했던 우리의 은인이기도 하다. ‘후퇴를 허락하지 않는 반격작전의 용장’으로 불렸던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공수단 군복에 수류탄을 달고 다니며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 어떤 기자가 수류탄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패튼 장군이 진주 손잡이가 달린 권총을 휴대하는 것과 같이 멋있게 사진을 찍기 위한 쇼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결코 쇼가 아니며 순전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유럽전선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라고 했다. 손에 수류탄을 지니고 다니는 병사는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한국전에서는 결코 전투 없이 포로가 되거나 매복을 당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고 했다.

 


Matthew Bunker Ridgway

 

1950 12월 미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할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계속 밀리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사단장 신분으로 부하들과 같이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용맹을 떨쳤던 리지웨이 장군은 부임 직후부터 비행기, 헬기, 지프차로 최전방을 돌며 장병들을 독려하고, 예하부대 작전참모가 후퇴위주 작전계획을 수립하면 그 자리에서 경질하는, 이런 공격정신으로 결국 서울을 재탈환한 후 전선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은 명장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이 어떤 마음으로 6.25전쟁에 임했는가 하는 것은 그가 1951 1 21일 고전중인 미 8군 장병들에게 보낸 글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그는 ‘우리는 왜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자주독립과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최선의 기회를 부여 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며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