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7일

어린이의 꿈의 궁전, 디즈니랜드 개원

산풀내음 2017. 6. 11. 07:24

19557 17,

어린이의 꿈의 궁전, 디즈니랜드 개원

 

창조력이 넘치는 세계 최초의 테마 파크 `디즈니랜드` 1955 7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 (Anaheim)에서 개원했다. 공식 개장은 익일인 7 18일에 했다 `마법의 왕국`은 중앙에 19세기 미국의 거리를 재현해 이 곳을 통해 여러 상상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개척의 나라로 구분되어 이는 상상의 나라는 방문자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물했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모험과 미래를 안겨주고, 어른들에게는 지난 날의 향수와 동심의 세계를 선사해 온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명소로 꼽히고 있어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Grand Opening of Disneyland





 

 

디즈니랜드의 창립자인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1901 12월 5 ~1966 12월 15)는 미국 시카고에서 4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디즈니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농장을 경영하며 농사일을 했던 아버지는 가족들 모두에게 농사일과 체벌을 강요했고, 그로 인해 디즈니의 두 형들은 집을 떠나버렸다. 어린 디즈니는 그렇게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매질을 당하며 농장 일을 해야만 했고,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월트 디즈니는 움직이는 그림인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후 만화가에서 애니메이터로 바꿨다. 그 당시 애니메이션은 체계적인 교육 기관이나 전문 서적도 없었기 때문에, 디즈니는 스스로 공부해야만 했다. 1921년 월트 디즈니는 첫 작품인 1분짜리 풍자 만화영화래프오그램(Laugh-O-Gram)‘을 완성했다. 래프 오 그램'은 그 시절의 소단위 규모의 사회문제들을 풍자한 짧은 만화로 신문에 연재되는 풍자만화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었다. 월트는 뉴먼이란 자를 찾아가 1분의 짧은 시사를 마쳤고, 지체 없이 그 필름은 뉴먼과 계약을 맺게 되었고 이와 함께 시리즈 계약도 체결하였다. 이후 월트는 자신의 작품명을 딴 래프 오 그램 필름사를 설립하고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된다. 그러나 지나친 제작비로 인해 그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먹을 음식도 없었고, 살 집도 없었지만, 그는 파일럿 필름으로 만들어 둔이상한 나라 앨리스만을 의지해 무작정 할리우드로 향했다. 그곳에는 진공청소기 판매원으로 일하던 형 로이 디즈니와 함께 형제는 친척들에게 돈을 빌렸고, 차고를 개조해 형제는 마침내 1923 10월에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았다. 디즈니 왕국의 첫 걸음은 그렇게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월트 디즈니는토끼 오스왈드를 발표했고토끼 오스왈드는 그에게 성공을 안겨줄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배급사였던 유니버설의 찰스 민츠가 디즈니를 따돌리고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디즈니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토끼 오스왈드의 판권 역시 찰스 민츠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찰스 민츠와 자신의 애니메이터들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 월트가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를 억누르는 심정으로 짤막한 시나리오 한 편을 썼다.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스토리에서 따온 것으로 제목은 미친 비행기(Plane Crazy)'였고 주인공은 로 결정했다. 이 수컷 는 오스왈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스튜디오에서 유일하게 월트의 편에 섰던 어브는 오스왈드의 귀를 줄이고 코를 통통하게 그린 캐릭터로, 아내 릴리언의 의견으로 미키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고 이 캐릭터가 현재까지 월트 디즈 컴퍼니를 대표하는 미키 마우스가 되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그 기차 안에서 난 무엇인가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생쥐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때의 내 신세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월트는 '미친 비행기(Plane Crazy)'의 시사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깔아 상영했는데 그때의 관객들의 환호를 상기시키며 작품에 사운드를 도입해보기로 했다. 이 아이디어는 그때 제작 중이던 미키 마우스의 두 번째 작품이 아닌 세 번째 작품 '증기선 윌리'에서 처음 실현시키기로 했다. 수 차례의 실험과 실패 끝에 가까스로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증기선 윌리를 완성했다. ‘증기선 윌리는 대성공이었다. 관객과 평론가들은 애니메이션에도 사운드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증기선 윌리 27살의 젊은 사업가 월트 디즈니를 할리우드의 새로운 스타로 만들어 주었고,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를 통해 그의 꿈을 이루었다.

 

그는 또 다른 도전을 감행했다. 제작 기간 3, 은행의 대출액 총 230만 달러, 250만장의 그림에 달하는 80분짜리 최초 장편 만화 영화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1937년에 개봉되었다. 백설공주는 개봉하자마자 그간의 고생을 모두 보상했고, 그로 인해 디즈니는 30대의 나이로 아카데미로부터 특별상을 받게 되었다.

 

 

1942년 어느 날, 두 딸을 데리고 놀이 공원에 갔던 디즈니는 회전목마를 타는 게 전부인 놀이공원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 옮겨 관객이 함께 스토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은 애니메이션만 만들었던 디즈니의 실패를 예상했다. 하지만, 디즈니는 이번에도 그의 꿈이 이루어질 것을 확실하게 믿었고, 그 꿈을 위해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싶었던 디즈니의 꿈과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Walt Disney with Orange County officials



 

1955 7 17일 테마 공원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다. TV를 통해 방송된 개막식에서 디즈니는 이렇게 말했다. "디즈니랜드는 바로 여러분의 나라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곳에서 과거 추억을,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도전과 미래에 대한 약속을 향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곳이 전 세계로 향하는 즐거움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개장일 일부 초청객과 언론인을 위한 '국제 언론 시연' 행사를 개최하였다. 개장 연설이 포함된 이 특별한 행사는 할리우드에서 온 월트 디즈니의 친구 아트 링크레터, 밥 커밍스, 로날드 레이건이 사회를 맡았으며 전국의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다. ABC방송국은 네트워크를 통해 이 행사를 생방송으로 중계, 역사상 가장 크고 복합적인 규모로 진행된 생방송 중 하나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법의 왕국'은 중앙에 19세기 미국의 거리를 재현해 이곳을 통해 여러 상상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개척의 나라'로 구분되어 방문자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물하기에 충분했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모험과 미래를 안겨주고 어른들에게는 지난날의 향수와 동심의 세계를 선사했다.

 

1971년 미국의 플로리다주에, 1983년 동경에, 1992년 파리에, 2005년 홍콩, 그리고 2016년에 상해에 디즈니랜드가 세워져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