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조칙 발표

산풀내음 2017. 6. 22. 20:30

19077 31,

대한제국 군대해산 조칙 발표

 

고종황제는 갑신정변 이후 근대식군대 도입을 생각해왔고, 친일세력제거와 일본의 제국침략의 야욕을 저지하고자 새로운 군대편성을 도입했다. 재정규모 자체는 미미했지만 국가 총지출의 25~40%를 투입하여 군대를 키웠기 때문에 대한제국군의 장비는 열강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했다.

 

대한제국군의 당시 장비

 

근대시위대는 1898년에는 시위 1대대와 2대대를 합쳐 시위연대로 개편, 포병 1개 중대를 새로 편성하여 맥심 기관총,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 야포와 암스트롱 야포 등이 보급되었고, 2년 뒤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시위기병대대를 설치하였으며 군악대 2개 소대도 설치하였다. 후에 보병도 2개 연대로 늘어나서 1902년경에는 총병력 5000여명의 막강한 전력이 구성되었다. 호위대는 국왕의 직접 경호를 담당했던 부대로서 총원 700명 가량으로 추정되며, 진위대는 창설 시 1개 중대 220, 1개 대대가 500명으로 일본식 편제로 평양과 전주에 1개 대대씩 설치 되었고 1900년부터 본격적으로 증강되어서 총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편성, 총 병력은 21천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헌병대는 1900년 설치된 원수부(元首府) 직할의 부대로 최대 5개 중대 규모였다.

 


 

1907 731일 늦은 밤,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지면서 고종황제의 강력한 근대식 군대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 제도를 쇄신할 생각 아래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하였다. ,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

 

비용절감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은 일주일 전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비밀각서에 의해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조칙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위조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사 및 사법권의 무력화를 시도했고, 군대해산도 그 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강행됐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이라 할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허수아비 내각 수반인 이완용의 '조회문'을 통해 추진하는 수법을 썼다.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꾸며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른바 황제의 하사금이라는 것도 나누어 주었다. 하사에게는 80,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원씩이 지불되었다.

 

1907 8 1일 오전 11시에 동대문 훈련원에서, 맨손 훈련을 한다고 병사와 장교를 소집해 놓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의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그 후 즉석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을 떼었다. 주위는 이미 일본군 헌병이 중무장한 채 도열, 병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 해산은 8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에 서대문에 있던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은 대한제국군의 해산 소식에 격분해 울분을 참지 못하고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을 택했습니다.

 

박승환(朴昇煥, 1869~1907), 대한제국의 군인이며 순국지사이다. 대한제국군 참령으로 시위 연대 제1대대장으로 재직 중에, 1907년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제위를 빼앗기자 궁중에 돌입하여 복위 운동을 펴려다가 고종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중지하였다. 이 해 8월 군대 해산을 위해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일본군 사령부에 집합시키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서소문 병영에 머물러 있다가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복장)이 추서되었고, 2003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위키백과)

 

부대원들은 남대문으로 뛰쳐나가, 일본군을 상대로 대한제국군대의 첫 번째 전투이자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령에 결사의 항쟁을 펼쳤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했고, 대한제국의 군인으로서 최후의 항쟁을 보였다. 대한제국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일본군이 미리 탄약고를 점거한 상황이었고, 탄약이 고갈된 밤 11시쯤 전투는 끝이 났다.

 

지방 상황도 마찬가지로 7개 진위대대 중 원주 진위대를 필두로 강화도, 수원 주둔 군인들도 맞서 항거했지만 8 10일께 3분의 2가 해산되었다. 이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은 장교 11명 등 68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부상당했다.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했고 항일의병의 전력이 예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이 시기 합류한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훗날 독립군이 되고 임시정부의 광복군 형성에도 큰 기여를 했다.

 

군대해산에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순국 선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