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일

일본, 청에 선전포고로 청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 본격화

산풀내음 2017. 6. 24. 05:57

1894 8 1,

일본, 청에 선전포고로 청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 본격화

 

1) 전쟁의 서막

 

청나라는 아편전쟁(1 1839-1842, 2 1856-1860)와 태평천국의 난(1850-1864)으로 크게 쇠퇴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보수파의 반발 등으로 서양의 겉모습만 모방하는 수준에 그쳐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이었다한편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하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이 틈을 타 조선 침략의 야욕을 키워나갔고 결국 1876 2 27일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만들었고, 청나라로부터는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수구파와 명성황후 중심의 개화파의 대립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고 결국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였고, 청나라에서 파견한 위안스카이의 도움으로 수구파가 재집권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개화파뿐만 아니라 일본 영사관이 불타고 영사관 위병과 민간인 중에 사상자가 나왔다.

 

1884년 김옥균으로 대표되는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서 근대화를 주장하고 우정국 연회 때 일본 주둔군의 힘을 빌어 조선의 개혁을 공포하는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에 밀려 삼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홍영식과 박영교(박영효의 형)은 청군에 피살 당했고 김옥균을 포함해 생존한 갑신정변 주역들은 후퇴하는 일본 병사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다가 인천항의 지도세마루 호를 통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그 결과 1885 4톈진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의정했다. 작게는 일본 병사 150명을 철수함으로써 청나라 병사 3천 명을 철병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크게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 침략을 더욱 가속화하여 1886년 한양에는 외국 상인은 오로지 일본 상인만 남게 되었다.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우여곡절 끝에 이홍장과 단판을 지으려고 1894 2월 청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일본 망명 시절에도 여러 번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들에 의한 살해의 위협을 잘 모면하였지만, 결국 1894 3 28일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려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는 다시 능지처참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2) 청일전쟁

 

1894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원세개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 병력 8,000명을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의 항의에도 1894 69일 이후 인천에 상륙, 7 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등의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1894 7월 25,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이를 풍도해전이라 하고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894 8 1, 일본은 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고 전쟁은 본격화되었다. 풍도해전에 패배로 청나라 군대의 사기는 꺾였고 해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산에서 우회하여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 군대와 합류하겠다는 전략을 세운다. 그러나 지금의 천안에서 청과 일본 군은 마주쳤고 청은 대패하게 된다. 일본은 평양으로 향했고 결국 청 1 2천과 일본 1 7천의 병력이 맞붙게 되었다.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9 5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결국 청나라 군대는 항복하였다.

 

당시 청나라 기함 정원함.

청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


 

이후 1894 9월 17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으며, 여기서도 청의 대패로 일본은 제해권을 확보하게 된다. 일본군은 10월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공격하였고 이어 11 21일에는 여순을 함락시킨다. 일본군은 계속 진격하여 1895 2월 웨이하이를 함락시켰고, 1895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에 청군은 강화전권대사 이홍장을 파견해 화의를 요청, 이듬해 4 17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내용은 1.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파기 2.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섬 할양 3. 배상금 2억냥 지불 4. 통상상의 특권 부여 등이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열강의 중국분할이 본격 시작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3) 청나라 군대가 질 수 밖에 없는 이유

 

청나라는 황실은 만주족이, 군권을 비롯한 실권은 한족(漢族)이 쥐고 있었다. 함풍제(咸豊帝, 1850~61 재위)의 후궁 서태후(西太后)가 반세기 동안 섭정을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서태후는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았고, 황제가 사망하자 당시 6세 된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同治帝, 1861~75 재위)로 즉위하면서 서태후가 섭정을 했다. 동치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네 살짜리 조카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주고 섭정을 유지 했는데, 그가 광서제(光緖帝, 1875~1908 재위).

 

좌로부터 서태후, 광서제, 이홍장

 

만주족 황실 입장에서 볼 때 일본과 전쟁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길러야 했으나, 군권을 운용하는 것은 한족이었다. 때문에 군사력이 강해질 경우 만주족 황실에 도전할 위험이 높아지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특히 청조 말에는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이 중국 전역을 14년 동안 휩쓸었을 때 한족 출신인 증국번(曾國藩)이 조직한 상군(湘軍), 이홍장(李鴻章)이 조직한 회군(淮軍)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 증국번은 만주족 정권에 도전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자 은퇴했고, 증국번의 군대를 물려받은 이홍장은 실력자로 떠올랐다.

 

이홍장은 스승 증국번 사망 후 청국의 군권을 쥔 북양대신에 임명되자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양무운동은 청국의 정치체계를 유지한 채 군사·과학·산업 분야에서 서구화를 추진하여 외세에 맞서고자 했던 운동이다.

 

그러나 보수 관료들의 반대와 견제로 행정과 정치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양무운동은 체계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 건설에 매진할 때 만주족 황실은 이홍장의 사병(私兵) 성격이 강한 북양육군과 해군이 증강되는 것을 우려했다.  

 

예를 들어 1884년 프랑스와의 청불전쟁 패배를 계기로 1885년에 북양함대를 건설하였고 당시 아시아 최강의 함대이었다. 그러나 함대에 사용되어야 할 돈이 서태후의 별장 건설비로 사용되는 등으로 북양함대 건설 후 10년 동안 청국은 해군에 대한 신규 투자를 하지 못했다. 1891년부터는 함대의 탄약 구입 예산조차 없어 청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정원과 진원함 주포의 포탄이 세 발밖에 없었다.

 

한편 북양육군의 경우에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실전 경험은 풍부했으나 정규군 간에 벌이는 본격적인 전투가 아니라 농민 반란군과 싸운 치안유지군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근대적인 정규전을 치르기에는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군대였다. 청군은 무기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 어떤 병사는 총, 어떤 병사는 칼과 방패 등으로 무장했다. 또 소총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서양인들이 쓰다 버린 것을 수입해 온 것으로서, 총과 탄환의 구경이 서로 달라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