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일

국보위, 신원기록 일제정리와 연좌제 폐지 결정

산풀내음 2017. 6. 2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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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 신원기록 일제정리와 연좌제 폐지 결정

 

헌법 제133항에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른바 연좌제(連坐制) 금지를 규정한 대목이다. ‘연좌제’란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게하고 처벌하는 제도를 말한다. 한국에서 연좌제가 폐지된 것은 1894년의 갑오개혁 때였다. 그 해의 6월 칙령(勅令)으로 ‘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하지 마라 (罪人自己外緣坐之律一切勿施事).’며 연좌제를 폐지했다. 이로써 역적도 삼족을 멸할 수 없게 되었고, 교분이 있었다 하여 연대책임을 지는 일은 과거지사로 돌릴 수 있게 됐다.

 

 

이 연좌제가 부활한 것은 다름아닌 한국 전쟁 때였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강 다리까지 폭파하며 급하게 도망간 이승만과 그 휘하들은 피난지에서도 서울 사수방송을 내보내 백만 서울 시민을 꼼짝없이 북한군의 수하에 두게 만들어 놓고는 서울 수복 후 돌아와서 행한 것이 바로 잔류한 부역자들에 대한 혹독한 검거와 낙인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전국적으로 행해져서 부역자, 월북자 그리고 부역자로 몰려 학살되거나 처벌받은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은 수십 년간 야만적인 감시와 신원조회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간주된 사람에게 주먹으로 화풀이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체포되어 처형장으로 끌려온 대구의 북한 공산군대 부역 혐의자들

 

이것 외에도 시국사범의 가족 또는 친족들이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여행 때 여권이 나오지 않거나 고위공직자 임명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허다했다. 연좌제 폐지는 3공화국 시절인 1966년에도 검토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 못하다가 1980년 신군부 시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지금까지 많은 국민들에게 피해와 불편을 주어온 신원기록을 일제히 정리하는 한편, 연좌제를 폐지함으로써 국민화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과감한 조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325일자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연좌제를 종식시킨 중심인물은 허화평으로 그는 장세동, 허삼수, 허문도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과 함께 12·12 쿠데타에 참여, 정권을 찬탈하였다. 그의 형은 일제 시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가 이후 이름을 바꿔 살았고, 막내 동생은 형의 영향을 받아 월북한 후 간첩으로 남파되어 체포,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육사 17기 허화평이 육군사관학교에 간 것도 기적 같은 일이지만 육군 장교 허화평은 그 후로도 몸조심하며 군생활을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의 후견인이 되어 준 건 물론 전두환이었다. 허화평은 그 한으로 '연좌제 폐지'를 밀어붙이고 이는 5공화국의 헌법에도 반영된다. 물론 그 뒤로도 얼마든지 연좌제는 자행되었기는 하나, 최소한 '법적'으로 연좌제는 폐지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연좌제의 망령이 떠돌아 다니는 것은 현실인 듯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노무현 전 대통령(장인), 김근태 전 의원(형제) 등 가족·친척의 좌익 경력 때문에 연좌제 공격을 당한 경우다.

 

그러나, 친일 청산과 관련해 선조들이 친일의 대가로 형성한 재산을 마치 자기가 형성한 재산인 것처럼 강변하며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연좌제의 망령과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상속할 경우 이익과 부채를 모두 떠안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대개의 친일파 후손들은 조상의 금전적 유산은 고스란히 상속하면서 조상의 친일 죄과에 대해서는 연좌제 폐지를 들며 면책을 주장한다. 이것은 상식적·법적으로 봐도 응당한 태도는 아니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 삭발시키고 알몸으로 끌고 돌아다니다가 처형까지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