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

산풀내음 2017. 6. 28. 19:10

1936 8 1,

베를린 올림픽 개막

 

1931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1936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베를린을 지명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던 독일이 다시금 국제 사회로 재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러나, 2년 후,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면서 일당 독재 체제로 전환시켰다.

 

1933 4, “오로지 아리아 인들로만" 정책은 모든 독일 운동 기관에 적용되었다. 유태인, 유태계 혼혈, 그리고 로마니(집시)같은비 아리아인운동 선수들은 독일 스포츠계의 시설과 조직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제명되어 갔다. 1933 4, 독일 권투 선수 연합회는 아마츄어 챔피언인 에리히 제리그(Erich Seelig)를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제명시켰다 (이 후 그는 미국에서 그의 권투 선수 생활을 재개하게 된다). 다른 유태인 선수이자 독일 최고의 테니스 선수인 다니엘 프렌(Daniel Prenn) 역시 독일의 데이비스 컵 팀에서 제명된다. 세계적인 높이 뛰기 선수였던 그레텔 베르그만(Gretel Bergmann) 역시 1933년에 소속팀에서 제명되고 1936년에는 독일 올림픽 팀에서도 제명된다.

 

에리히 제리그(, ), 다니엘 프렌(, ), 그레텔 베르그만(아래)

 

그래서 당초 히틀러는 “올림픽은 유태인이 지배하는 추악한 제전”이라며 반대했지만 “올림픽이야말로 나치 독일의 힘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라는 선전상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 10월 29 ~ 1945 5월 1)의 설득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괴벨스는 나치 독일에서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의 자리에 앉아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히틀러의 최측근 역할을 했다. 1945 아돌프 히틀러가 죽은 후 하루 뒤에 포위된 벙커 안에서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하였다.

 

히틀러()와 괴벨스()

 

이런 가운데 베를린 올림픽을 보이콧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와 네덜란드에서 표면화되었다. 특히 이 논쟁은 미국에서 그 논란의 강도가 가장 강하였다. 미국에서는 일부 유태인 선수와 미국 유태인 의회 그리고 유태인 노동 위원회가 올림픽 보이콧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35 12, 미국 아마츄어 운동 선수 유니온이 투표에 의하여 참여를 결정하자 다른 나라들도 이에 동참하였고 보이콧 움직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치는 8 1일부터 16일까지의 하계 올림픽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다. 거대한 규모의 스포츠 단지를 건설하고 올림픽 국기와 스와스티카 깃발이 베를린을 가득 채운 상징물과 축제 건물을 장식하였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나치 통치가 일시적으로 반 유태주의 표지판을 철거한 사실이나 독일 내무성 명령으로 독일 경찰이 베를린의 로마니 집시들을 일제 검거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36 7 16, 베를린과 그 근교에 거주하는 약 800여 명의 로마니 집시는 경찰에 체포되어 베를린 교외의 마르잔이라는 특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나치 간부들은 또한 관광객들이 독일의 반 동성연애 법에 적용 받지 않도록 하는 특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베를린 올림픽 이전에 레스토랑과 호텔 등지에서 흔히 보였던 유태인 입장 금지 표지판이 올림픽 기간 중에는 사라짐.

 

또 한편 국제 여론의 악화를 진정시키기 위한 제스츄어로 독일 당국은 유태인 계열의 펜싱 선수 헬레네 마이어(Helene Mayer)를 올림픽 대회의 독일 대표 선수로 선발하였다. 그녀는 올림픽 여자 개인 펜싱에서 은메달을 차지하였고 다른 독일 메달리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단상에서 나치에 경례하였다. 그녀 이외에 독일 소속 선수로 활약한 유태인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유태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대표로 출전한 헬레네 마이어(Helene Mayer)

 

헬레네 마이어는 17세인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제9회 올림픽에 독일 대표로 참가해 펜싱 금메달을 땄고, 1932년 미국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했다. 그러나 1933년에 그녀의 아버지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갔지만,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일 선수로 참가해 달라는 나치의 제안을 받아 들여 독일 대표로 출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 생활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유태인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

 

1936 8 1, 히틀러는 제 11회 하계 올림픽 개회를 선언하였다. 1000여명의 합창단이 당대의 거장 슈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행진곡에 맞춰 큰 목소리로 합창하는 가운데 나치 돌격대 수천 명이 12만 명이 운집한 베를린 경기장 안을 거위걸음으로 행진한다. 환영사에 이어 히틀러가 개회를 선언하자 스타디움에 들어선 제1회 아테네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루이스가 성화를 점화한 후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가져온 올리브 가지를 히틀러에게 건넨다. 1936 8 1, 11회 베를린올림픽은 이렇게 개막됐다.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을 찾은 독일 국민들의 모습


나치 깃발 사이로 정렬한 독일인 사이를 지나는 베를린 올림픽 성화 봉송주자의 모습

 

그리스로부터의 릴레이 성화봉송을 처음 채택해 개막식 분위기를 극적으로 고양시켰고, 레니 리펜슈탈에게는 기록영화 ‘올림피아’를 찍게 했다. 또한 올림픽경기에서 국기 대신 나치스 당기(黨旗)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였으며, 이 올림픽을 통해 지나친 국위선양을 염두에 두어 대회장 안팎 곳곳에 하켄크로이츠기를 날리게 하여 정치적, 군사적인 색을 입힘과 동시에 나치스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전 세계에 자랑하였다. 결국 나치 사상 선전의 장으로 올림픽이 악용되었다.

 

 

전 세계에서 49개국의 선수단이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였는데 이는 이전의 어느 올림픽보다 많은 숫자였다. 독일 선수단은 348명으로서 이 중 최대 규모였다. 미국 선수단은 312명으로써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여기에는 18명의 흑인 선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올림픽 위원회 회장인 에이버리 브룬데이지(Avery Brundage)가 이 선수단을 지휘하였다. 소련 선수단은 이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베를린 올림픽은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실시간으로 경기를 중계한 올림픽이며, 베를린 전 지역에 25개의 대형 화면이 설치되어 올림픽을 무료로 볼 수 있었다.

 

The eights final at the 1936 Olympic Regatta, an event which inspired Jock Lewes.

 

히틀러의 정치쇼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차질을 빚었다. 나치스에 의해 미국 흑인선수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분위기도 조성되었으나, 나치 독일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었던 미국제시 오언스 (James Cleveland "Jesse" Owens, 1913 ~ 1980)100m 세계신기록을 포함, 200, 400m계주, 멀리뛰기에서 우승 등 4관왕에 올랐다. 오언스가 히틀러를 난감하게 한 주인공이 되었고, 히틀러는 오언스가 메달을 받을 때 분노한 표정으로 대회장을 떠났다.

 



Jesse Owens and fellow Olympians competing in the 400 meter relay, Berlin Olympics, 1936

 

당시 한국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한국인 최초로 마라톤 경기에 손기정남승룡이 일본 제국 선수로 출전하였으며,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일장기 말소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기정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