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일

6.25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 전투

산풀내음 2017. 6. 28. 19:13

1950 8 1,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 전투

 

1950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몰아쳤다.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전쟁 발발 3일만인 6 28일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7 5일에는 오산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하고, 7 24일에는 대전을, 7월 말 목포와 진주를 함락시켰다. 결국 7월말, 아군은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밀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지역은 대구와 부산뿐, 국토의 5%에 불과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그 해 815일 부산에서 통일기념식을 갖겠다고 호언했고, 여의치 않자 대구 점령의 날로 못박고 총공세에 나섰다. 대구마저 빼앗기면 한반도에는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지리적인 공간조차 남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한미연합군을 지휘하던 미 8군사령관 월턴 워커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81, 워커 사령관은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른바낙동강 방어선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이 바로 칠곡이었다. 칠곡 왜관을 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최후의 배수진인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가장 치열했던 곳이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다부동은 대구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이 뚫리면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북한군은 낙동강을 건너고 다부동을 넘어 이곳에서 20여㎞ 떨어진 대구를 삼키려 했다. 적의 주력부대가 칠곡 다부동에 집중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군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것. 결국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해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로 한다. 마침내 83, 왜관철교를 폭파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 왜관철교에는 수십만의 피란민이 뒤섞여 있었다. 경고사격을 가했지만 이마저도 소용없었다. 여기에 적의 게릴라군이 피란 대열에 끼여 강을 건너와 아군의 작전에 적잖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당시 왜관철교 폭파 책임을 맡은 게이 소장은 쉽게 폭파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지체할 수는 없었고 결국 그날 오후 830분 폭파명령과 함께 일대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왜관 철교 폭파 후 미군은 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전차 도하를 잠시 저지할 수 있었다.

 

폭파된 왜관 철교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아군은 초기 방어선(왜관을 축으로 낙동강 연안 남쪽 방어선)으로 일단 철수했고, 초기 방어선이 너무 넓어 적에 대한 효율적 대응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축소된 방어선으로 이동하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다부동의 왼쪽은 328고지와 수암산,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이 있었고 오른쪽은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들로 둘러싸여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이곳은 대구에 이르는 관문으로 대단히 중시됐다.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한 815일이 가까워지자 북한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8월 총공세였다. 적은 수중교를 가설해 낙동강을 넘어왔다. 동시에 주력부대를 다부동 일대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전세는 아군에게 극히 불리했다. 병력 규모만 따져봐도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다. 전사(戰史)에는 북한군이 주력부대인 13사단과 3사단, 1사단, 15사단 등 21천여 명의 병력을 다부동 일대에 투입해 대구 점령을 노렸고, 이에 맞서 아군은 국군 1사단과 7사단 3연대 1대대, 8사단 10연대, 미군 27연대와 23연대가 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200여명의 병력으로 맞섰다고 기록돼 있다.

 

뺏고 뺏기는 전투는 8월의 더운 날씨만큼 뜨거웠다. 328고지, 유학산, 수암산, 가산 등 다부동 일대의 주요 고지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813일부터 12일간 전투가 벌어진 328고지에서는 고지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만큼 치열했다. 한 번 전투를 치르고 나면 절반의 전우가 사라지고 없었다. 고지 전체가 바위산이기 때문에 호를 파기 어려워 병사들의 시신을 쌓아 올려 방호막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814, 일촉즉발의 기운이 감돌았다. 북한군이 주력부대인 3·13·15사단 등 3개 사단을 다부동 일대에 집중 배치, 이곳을 정면 돌파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려왔다. 국군 1사단이 버티고 있었지만 수적 열세였다. 결국 미 8군 작전처는 특단의 조치를 계획하고 UN군사령부에 건의한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생로(Saint Lo)’ 지역에서 펼쳤던 융단 폭격이 그것이었다.

 

마침내 816, 융단 폭격이 칠곡 약목면 일대에 가해진다. 일본 요코다와 가데나 비행장에서 출격한 B-29 전략폭격기 98대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이날 오전 1158분부터 26분 동안 폭탄 960t이 투하됐다. 융단폭격으로 북한군의 기세는 바닥에 떨어졌고, 특히 보급로와 통신망이 치명타를 맞았다. 융단폭격 후 적의 공세는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아군은 전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8월 총공세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북한군은 마지막까지 대구·부산 공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8월 공세에서 남은 잔존병력과 장비를 모조리 대구 인접지역의 낙동강 교두보로 이동해 9월 총공세에 나섰다. 92일 북한군의 총공세는 시작되고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적의 8월 총공세를 막고 크게 고무된 아군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국군은 916일 다부동 북서쪽 11㎞ 지점의 천생산을 탈환하고, 24일 잔적을 소탕한다. 그렇게 다부동 전투는 55일 만에 끝이 난다.

 



대구 북방에서 90mm 대공포를 이용, 치열한 지원 포격을 감행하고 있는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장병들. 다부동 전투는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절대적인 현 위치 사수전 .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전차

파괴된 북한군 전차 사이로 진격하는 우리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