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일

고려대 박춘호 교수,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으로 피선

산풀내음 2017. 6. 2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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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박춘호 교수,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으로 피선

 

고려대 박춘호 교수가 1996 8 1일 국제해양법재판소(International Tribunal for the Law of the Sea, ITLOS)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박 교수는 해양법 협약에 가입한 102개국 중 1백 개 협약 당사국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재판관 선거 1차 투표에서 3분의 2가 넘는 69표를 얻어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재판관이 받는 예우는 유엔 사무차장급이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1994년 발효된 유엔 해양법 협약에 근거해 1996 10월 발족됐다. 이에 앞서 유엔은 지난 1982년 점증하는 해양분쟁의 틀을 잡기 위해 15년간의 작업 끝에 전문과 부칙 450개조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바다에 관한 세계법`인 해양법(The Law of The Sea)을 만들었다. 해양법재판소는 이 법률을 만든 뒤 협약 가입국들이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상정해 강제수단으로 창설케 된 것이다.

 

박춘호 교수는 일본 강점기인 1930년 남원 지리산 벽촌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30세 늦깎이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시절 한·일간 어업분쟁이 격화되는 것을 보며 해양법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졸업 후 문교부 영어담당 편수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한동안 접어두었던 해양분야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올라 에든버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2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 법률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1982년부터 고려대학교 법학과에서 국제법, 특히 해양법과 국제기구론을 중심으로 가르치셨다. 문교부 편수관 시절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업무를 마친 저녁 시간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일을 했던 것과 영국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학문에 몰두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버드대 동아시아법률연구소 연구원으로 해양분야 연구활동에 본격 나선 박춘호 교수는 8년의 연구원시절 동아시아 관련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석유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해저분쟁'이나 '분쟁해역의 어업' 등의 논문들이 세계적 학술지에 발표됐으며, 뉴욕타임지와 가디언지 등에 대서 특필됐다.

 

동북아의 해양법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그가 1984년 발간한 `동아시아와 해양법' 영문 저서는 미국과 중국 등지의 대학교재로 채택되고 중국어러시어로 번역판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이 저서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의 국가간 영토 및 국경 관련 해양 분쟁에 대하여 심도 있게 분석한 것으로 박춘호 교수가 왜 국제해양법의 개척자라는 평을 받는지 잘 알 수 있는 대표적 저서이다. 본인이 대학 졸업 때 교수님께서 친필 서명과 함께 집에 장식용으로 두지 말고 꼭 읽어야 한다라는 당부 말씀과 함께 주셨는데, 책을 받은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끝까지 읽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다.

 

또 중국의 석유에 대한 연구에도 조예가 깊어 1973년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이에 대해 브리핑을 했고 1984년 발간된 `북한의 해양법문제'라는 논문은 북한 해양법에 대한 최초의 연구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해양법연구소 집행이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20여 년간 40여 차례에 걸쳐 UN해양법회의에 참가해 국제해양법 체계의 완성과 국제해양법재판소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이 같은 활동들을 평가 받아 국가간 해양관련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1995년 독일 함부르크에 설립된 국제해양법재판소 초대 재판관으로 1996년 뽑혔으며, 2005 9년 임기의 재선에 성공했다. 또 동아시아 처음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법단체인 국제법학회(Institut de Droit International) 회원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영어, 일어, 중국어는 모국어 같이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불어, 독어, 베트남어도 구사할 수 있어 한국어를 포함하면 7개국어가 가능하였다. 살아 계실 때 농담 삼아 불어, 독어, 베트남어는 자국민과 농담할 수준은 아니야 라고 하시면서 함박 웃음으로 보이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일본과 중국 대학에서 직접 그 나라말로 강의를 하셨으니 그 수준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2008 11 12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