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5일

광화문 1865년 원형으로 복원, 개문식(開門式)

산풀내음 2017. 7. 9. 06:31

2010 8 15,

광화문 1865년 원형으로 복원, 개문식(開門式)

 

경복궁의 남측 정문이자 수도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이 3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1865년 고종 때 중건(重建)된 모습으로 2010 8 15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Xfu9A-rzyAk&t=12s

 

 

 

光被四表 化及萬方(광피사표 화급만방, 빛이 사방으로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치다)"라는 『서경(書經)』 구절에서 유래한 광화문(光化門)은 태조 8(1399) 조선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던 경복궁의 정문으로 세워졌다. 광화문 앞에는 의정부와 육조의 관청들이 늘어선 육조대로가 있었는데, 이처럼 광화문은 궁문이라는 건축학적 의미와 관청들을 거느리고 왕실의 의식을 거행하는 자리라는 상징적 의미의 정치공간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함께 훼손되고 만다. 이후 260년 정도 폐허로 남겨졌다가 고종 1(1864)에 이르러서야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 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에 짓기로 결정하면서 광화문이 총독부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완전 철거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반대여론에 부딪히자 일제는 조선총독부가 완공된 이듬해인 1927년 광화문을 헐고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북쪽(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으로 광화문을 옮겼다.

 

당시 일본인 중에도 광화문을 허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 이가 있었으니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대표적이다. 그는 신문의 기고문을 통해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 어찌하면 좋을까?"하고 탄식하고 일본인들에게 "가령 일본이 쇠약하여 마침내 조선에 합병됨으로써 궁성이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저 양풍(洋風)의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라고 쓰며 광화문 철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1900년대 광화문

 

 

1926년 광화문, 이전 직전의 광화문 모습

 

 

1927년 현 국립민속박물관 전문 위치에 있었던 광화문

 

 

조선총독부 건물이 당시 남산에 있던 일본 신사를 바라보게 한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속뜻은 따로 있었다. 일제는 조선조 정궁의 기본 축을 변형시키고 문을 옮겨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소행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행위와 같은 맥락이었다. 건춘문 북쪽에 덩그러니 남겨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중에 하부의 석조 기단을 제외한 상부의 목조건물마저 소실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이후 20년간 방치되었다.

 

 

 

1950년 대, 전쟁으로 소실된 광화문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에 기단은 그대로 사용하고 상부의 건물은 철근콘크리트로 재현했지만 전면에 도로가 개설돼 일제에 의해 왜곡된 광화문의 배치 축과 위치는 바로잡지 못했다. 재료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하게 돼 일제에 의한 정체성 왜곡이 그대로 지속됐다. 또한 복원된 광화문은 당시 중앙청으로 사용하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리기 위해 총독부 청사 축에 맞춰지면서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가 틀어졌다.

 

 

 

 

 

 

1990년대 들어 경복궁, 광화문, 육조대로로 이어지는 공간을 복구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1991경복궁복원기공식’, 1995년 조선총독부 첨탑 제거, 그리고 1996 10월 조선총독부 건물 완전 해체가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사라지게 되면서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과 광화문이 공간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1865년 광화문 중건과 같은 날인 2009 11 27일 광화문 상량식(上梁式)이 거행되었다.

 

이번 복원을 통해 문화재청은 원래 자리에다 옛 방식대로 나무로 문루를 다시 세우고, 자료 고증과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번에 공개된 주요 복원 건물은 광화문을 비롯해 부속 건물인 용성문(用成門), 협생문(協生門), 동·서 수문장청(守門將廳), 영군직소(營軍直所) 7동이다. 또한 복원된 광화문 현판(懸板) 1968년 복원 시 만들어져 걸려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편액 대신 고종 때 경복궁 중건 시 영건도감 제조(提調·책임자) 임태영(任泰瑛)의 현판을 디지털 복원해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