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17일,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의문사
독립군이었으며 유신체제에 맞서 싸웠던 사상계 발행인이자 민족통일 운동가였던 장준하(1918-1975)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56세였다. 1953년 4월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자유언론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1970년 5월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을 게재한 것이 빌미가 돼 그 해 9월 지령 205호로 폐간 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75년 8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장례미사
이날 장준하가 등산도중 실족해 추락사했다는 검찰 발표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1) 등산에 능했던 장씨가 위험한 굳이 추락지점을 하산로로 택했다는 점, 2) 14,7m나 되는 높이의 벼랑에서 떨어졌는데도 전신에 골절상과 찰과상이 없었고 옷이 찢겨지지 않았고 휴대한 보온병과 안경이 말짱했다는 점, 3) 어깨 안쪽에 피멍이 들어 있어, 어깨가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듯한 흔적이 있었고, 4) 유일한 목격자라고 주장했던 김용환의 주장은 입을 열 때마다 변신을 거듭한 것 등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여기에 더하여 5)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유골에는 그의 '추락사'한 시신만큼 깨끗하게 뚫린 지름 6cm의 원형 구멍이 있었고 팔과 엉덩이에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
장준하 의문사의 시작과 끝은 당시 사건을 목격했다는 김용환이다. 그는 1967년 장준하가 7대 국회의원 출마 시 자원봉사자로 첫 인영을 맺었고 이후 1971년까지 지구당 간사 등을 맡았다. 1971년 장준하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자 그 곁을 떠났고 그리고 사건 당일 다시 나타난 것이다.
김용환의 조사 당시 최종적으로 주장했던 것에 따르면 그는 1975년 8월 17일 오전 9시경 장 선생과 함께 포천 약사봉으로 산행을 간다. 오전 11시 30분. 약사봉에 도착한 그는 장 선생을 비롯한 산악회원과 함께 약 30여 분에 걸쳐 물이 흐르는 계곡 끝자락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일행보다 늦게 끝자락에 도착한 김용환씨는 누군가로부터 장 선생이 혼자 산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뒤쫓아 올라갔다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군인 2명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장 선생을 만났다는 그는 이어 함께 산행을 시작했고 산 정상 부근에 이르러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하산 도중 발생했다. 앞장서서 먼저 내려가던 그의 뒤를 쫓아오던 장 선생에게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고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해 김용환씨는 조사 기간 내내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장은 일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75년 이래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장준하의 최후는 "소나무를 잡고 하산하다가 이 나무가 휘면서 추락, 실족 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의 "내가 봤다"는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1988년 재조사 기록에서 김용환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목격한 것이 아니라 다음 날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알게 되었다고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2013년 8월 4일,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선생(좌)이 김용환(우)을 찾아가 따귀세례를 퍼 부었다. 김용환는 박선생의 "당신이 선생을 죽였는가"라고 수 차례 거듭된 질문에 "아니다." 라는 대답대신 "난 선생님을 존경했다. 할말 없다"라고 만 대답하였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숙적’이었다. 두 사람의 삶은 극과 극을 달렸다. 장준하는 26세 때인 1944년 1월 일본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같은 해 7월 중국 쑤저우에서 탈출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근무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광복군에 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왼쪽부터)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찍은 사진.
장준하가 피난 수도 부산에서 ‘사상계’를 창간한 이래 4월 혁명 때까지 이승만 독재에 맞서 정력적으로 필봉을 휘두른 데 반해, 박정희는 1961년 5월, 그 혁명을 뒤엎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1960년대 중반에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굴욕적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에 맞서 장준하는 재야조직 활동과 개인적 행동을 통해 박정희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장준하 선생(좌)과 오적이 실린 사상계 5월호(우). 결국 폐간의 아픔을 겪게 된다.
1966년에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졌을 때 장준하는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공격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으로 종신집권체제를 굳히고 나서 독재를 강화하던 1973년 12월 장준하는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이듬해 4월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간경화증과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병상에서 박정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파괴된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민족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민주헌법으로 하여, 이 헌법으로 자신의 거취는 물론 앞으로 모든 집권자들의 규범으로 삼게 하라”고 촉구했다. 장준하는 1960~1970년대에 37 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당하면서 박정희의 독재에 맞섰다.
장준하는 1975년에 들어서자 평소 잘 만나지 않던 김대중을 비롯해서 함석헌, 홍남순을 접촉하며 광복 30주년인 8월 15일에 ‘모종의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마침 김영삼이 동남아를 여행하고 있어서 그가 귀국한 뒤인 8월 20일로 계획이 연기되었다.
당시 유신정권은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해 하산 도중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했지만 현재까지 명확한 사인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 당한 장소에 동지와 후배들이 비석을 세운 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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