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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육’ 창간호 내용이 문제돼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과 교사 2명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산풀내음 2017. 7. 12. 22:32

19858 17,

민중교육’ 창간호 내용이 문제돼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과 교사 2명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4·19직후 교사의 가입률이 90%를 넘었던 전국교원노조운동이 5·16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에 의해 용공 혐의로 초토화된 뒤 교육계에는 학생이나 노동운동과 달리 조직적 저항이 거의 없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젊은 교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새로운 토대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젊은 교사들은 기존 학자나 외국의 교육이론만으로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분석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들은 새로운 교육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고, 교사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4년부터 김진경과 윤재철 등은 ‘오월시’와 ‘삶의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는 문인 출신 교사들과 오랜 논의 끝에 새 매체 기획안을 만들었다. 출판사는 당시 재야 운동의 핵심인 시인이자 소설가 송기원이 편집주간으로 있는 실천문학사로 정했다.

 

1985 520, ‘민중교육’ 창간호가 발간됐다. ‘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함축하듯 ‘민중교육’은 이전의 여느 교육 잡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새롭고 강력한 메시지를 내뿜었다. 교육민주화를 주창한 민중교육은 교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여의도고교 교장이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책 내용이 불온하다며 진정을 하자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책 내용과 집필자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중·고등학교 교감회의와 장학사회의를 열어 각급학교 교사들에 대한 관찰과 지도를 지시하였다. 이어 1985 7 19일 실천문학사 주최로 《민중교육》출판기념회를 열려고 하자 경찰들이 출판기념회 장소를 봉쇄하여 무산시켜 버렸다.

 

이를 계기로 관련 교사들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하고 좌경용공이라 몰아붙이며 원고를 싣거나 직·간접적 관계를 맺은 교사들을 검거하였다. 그 결과 8 17일 양정고 김진경 교사, 성동고 윤재철 교사와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되었다.

 

1986 2월 실천문학사에서 발행한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된 소설가이자, 당시 실천문학 주간이었던 송기원씨가 서울 형사지법 제1심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양정고 김진경 교사

 

아울러 교육위원회도 관련교사 징계를 강행하려 하자 교사들은 1985 8 6일 문교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개 질의서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학생들 역시 교사처벌에 대한 집단적으로 항의하였다. 그러나 1985 8 12일 각시도 교육위원회는 조사받던 20명 가운데 10명 파면, 7명 강제사직, 2명 감봉, 1명 경고하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짓고자 하였다.

 

1986 2 13 1심 재판부(판사 문윤길)는 김진경과 윤재철에게 국보법 제71(찬양, 고무, 동조, 선동 등), 송기원은 동법 제7조 제5(이적표현물 제작, 수입, 복사, 소지, 판매 등)을 적용, 실형을 선고했다. 1986 6 13 2(판사 김종배, 조연호, 조재연)도 유죄였다. 김진경의 상고심도 기각되었고 실천문학은 8 23일 폐간조치를 당하였다.

 

유죄로 끝난 듯한 이 사건은 1987 6월 항쟁 이후 조성된 정세 속에서 법적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그 주인공은 송대헌이었다. 그는 1986 7 25일 경북도교육감을 상대로 파면취소처분 소송을 내어 1988 96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당시 대구고법(판사 이주성, 김진기, 이인환)은 “『민중교육』의 내용을 정사하여 보면 좌담이나 논설문 중에 다소 과격한 논리를 펴는 경우도 엿볼 수 있어서 급진좌경주의자들의 계급투쟁이론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 것이 있기는 하나, 원고가 쓴 위 <야학일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글은 그와 같이 볼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으므로 『민중교육』잡지 전체의 성격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반체제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파면처분은 징계사유가 되지 아니하는 것을 징계사유로 삼아 징계를 한 것이거나, 징계의 양정을 현저히 그르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판시하였다.

 

이 사건은 교육문제를 제기했던 현직교사들에 대해 정부가 민감하게 과잉반응을 보임으로써 교육문제에 대한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으며 전교조 결성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