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9일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과 청 난징(南京)조약 체결

산풀내음 2017. 7. 21. 17:40

18428 29,

영국-, 난징(南京)조약 체결

 

아편전쟁을 결말짓기 위한 난징조약이 1842 8 29일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체결됐다. 난징(南京)의 양자강 위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 콘 윌리스 호에서 청나라 대표 기영과 영국 대표 포팅거가 강화조약에 조인함으로써 아편전쟁은 청나라의 일방적 패배로 그 막을 내렸다.

 

 

조약은 홍콩의 할양, 상해를 비롯한 5개 항구의 개항 등 청나라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난징조약은 아편전쟁을 수습하기 위한 조약이었음에도 아편 그 자체에 대하여는 전혀 논의가 없어, 조약체결 후에도 아편의 밀수입은 계속 성행하여 오히려 아편전쟁 전의 배로 증가할 정도였다.

 

참고로 홍콩은 1842 아편 전쟁 이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맺은 난징 조약에 의해서 홍콩 섬이 영국에 할양됐으며, 1860에는 베이징 조약으로 주룽 반도 남단부가 영국령이 됐고 1898에는 신계 지구를 99년간 영국이 조차하면서 지금의 홍콩에 이르렀다. 그리고 1984 12 19일 베이징에서 자오쯔양 총리와 대처 총리 사이에 홍콩 반환 협정이 체결되었고 1997 7 1일 중국에 반환되었다.

 

청국은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외국 무역은 광저우항(廣州港)에 한하며, 또한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단체(길드)를 통해서만 허가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외국 여러 나라 중에서 영국이 광저우 무역의 중심이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출은 비단, , 도자기 등이었고, 영국은 약간의 모직물, 향료 정도이며 그 밖에는 대량의 은()으로써 비단과 차를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세기 말 영국 정부가 차의 수입세를 인하하고부터 일반 국민 사이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보급되어 중국차(홍차)의 수입이 급증하였다.

 

영국은 당시 미국의 독립전쟁 등으로 전비 조달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수입초과의 상황이었고 이를 타게 하기 위하여 무역 확대 등의 교섭을 하였으나 실패하자 생각한 것이 아편무역이었다.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영국은 면포를 인도에 판매하고 그리고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수출하여 무역 적자를 상쇄함과 동시에 그 돈으로 다시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사서 영국에 가져감과 동시에 막대한 은도 함께 가져가는 삼각무역을 정립하게 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육체 노동으로 지친 중국의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아편장사를 했고, 아편은 19세기 중국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청나라는 이미 1796년에 아편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아편의 유통을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갔다.

 

1830년대가 되자 중국 은의 유출량이 유입량을 초과하게 되었다. 이는 은의 가격을 급등하게 만들었고 본위(本位)화폐인 은화 가격이 오르는 것은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상 동전을 사용하면서, 이것을 은으로 환산하여 납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민에게 있어 동전에 대한 은의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은 심각한 것이었다. 또한 관청, 특히 군대 안의 아편 중독환자가 급증한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에 1936년에는 이금론(弛禁論)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아편을 합법화시켜 정규 관세를 징수하고 대신 아편의 거래수단으로 은을 지불하는 것을 금지시켜 은의 국외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꽃의 재배를 금지시키고, 일반 백성의 아편 흡연은 간섭하지 않는 대신 병사, 지식인, 관료들의 아편 흡연은 단속해야 한다고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실효성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1839 3월 청나라의 황제 도광제(재위: 1820 ~ 1850) '아편엄금론'을 주장한 임칙서(린쪄쉬)광둥 으로 보내게 된다. 1839 6월 3 임칙서는 23일에 걸쳐 영국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이 거두어 보낸 외국 상인들의 아편 20,000 상자를 모두 녹여버리는 등 철저히 아편 단속을 했고, 모든 외국인은 마카오로 떠나고 다시는 아편을 취급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지 않으면 광저우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상인들은 서명을 거부했고 임칙서는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마카오의 포르투갈 정부에게 상인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상인들은 마카오에서 다시 당시 작은 섬이었던 홍콩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러자, 영국 산업 자본가들은 '청나라가 무역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했다.'고 비난하며 영국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이에 영국정부는 1839 10월 원정군 파견을 결정하였는데, 이로써 '1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1839 7 7, 주룽(九龍)에서 술에 취한 영국인 선원들에게 중국 농부 임유희가 살해된 사건은 전쟁 발발의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이 임칙서가 요구한 범인의 인도를 거부하자 8 16일 임칙서가 마카오를 무력으로 봉쇄했다. 1839113일 파견한 원정군이 마카오에 도착하면서 무장충돌이 시작되었다. 임칙서의 무역 거부 응답을 구실로 영국은 전쟁을 시작하고, 청국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로써 선전포고 없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1840 6, 함선 48척과 병력 4,000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가 홍콩에 집결하면서 본격적인 아판전쟁이 시작되었다. 광저우 분쟁의 찰스 엘리엇의 친척인 조지 엘리엇이 영국 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았다. 엘리엇 제독은 4척을 보내 광저우항을 봉쇄하게 하였고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주강을 거슬러 올라가 11월에는 베이징에 이르는 통로에 있는 다구(大沽), 톈진(天津)을 위협하자, 청조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철저한 항전파인 임칙서를 전쟁 도발자로 몰아 면직시키고, 강화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주장이 너무 달라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해 증원부대 1만을 추가한 영국군은 양쯔강으로 침입하여 난징에 육박하였다. 청조는 민중을 무장하여 장기에 걸치는 게릴라전을 수행할 입장이 못 되었다. 무장한 민중이 이민족 지배자인 청조를 위협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규군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고, 일부를 제하고는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1842 8월 29 영국군은 광저우를 포위해 조약을 맺고 전쟁은 종결되고, 영국은 배상금 600만 달러를 받고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