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9일

인민공사 설립과 대약진 운동

산풀내음 2017. 7. 21. 17:50

19588 29,

인민공사 설립과 대약진 운동

 

1950년대 초반까지 100만∼300만 명을 처형해가며 사상개조를 끝낸 마오쩌둥은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담당 조직으로 인민공사를 설립하고 빠른 성과를 위해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1957 11월 6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소련이 공업 생산 및 농업 생산으로 15년 이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뒤질세라 마오쩌둥도 1958년에 우리 중국 경제는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와 함께 1958 829, 중국 공산당의 한 회의에서 인민공사 설립이 결정되었고, 결과적으로 중국 현대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 더해지게 되었다. 인민공사는 농업을 기본으로 공장, 상점, 병원 등을 경영하고 교육기관과 자체 민병대까지 갖춘 종합조직이었다. 토지, 농기구, 가축은 인민공사 소유로 하고 생산은 집단으로 진행됐다. 이미 사상개조까지 마친 터라 농민들의 초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3개월 후 전국에 26000여 개의 인민공사가 생겨나고 전 농가의 99%가 인민공사로 조직될 만큼 전국의 인민공사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으로 대표되는 마오쩌둥의 경제정책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토법고로(土法高爐)

 

산업화를 위해서는 철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공학에 무지한 마오쩌둥은 엄청난 돈과 기술이 필요한 큰 제철소 대신 마을마다 소규모의 재래식 용광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에 100만개가 넘는 토법고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기대와는 달리 쓰레기 철만 생산되게 되었다.

 

2)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

 

농촌을 지나다가 곡식을 먹는 참새를 보고는 참새, 들쥐, 파리, 모기 등 해로운 4가지를 박멸하게 한다. 결국 2억 마리가 넘는 참새를 잡아들였다. 하지만 참새가 사라지자 해충이 무더기로 불어나 오히려 농업생산량이 줄어들었다.

 

3) 수확적 농법

 

첸쉐썬이란 수학 박사가 마오쩌둥에게 논에다 벼를 아주 빽빽하게 심으면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보고하자 그는 이 보고서 대로 시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문제는 보고서가 농업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보고서에서 제안한 10cm *15cm는 벼끼리 성장을 방해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5년 안에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따라잡겠다던 목표는 강철 대신 고철을 양산했고, 부풀린 농업생산실적은 과중한 세금만 초래했다. 지나친 ‘균등’도 생산의욕을 감퇴시켰다. 결국 1959년부터 1962년까지 3,000만 명이나 굶어 죽었다. 마오쩌둥은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사죄는커녕 변명만 늘어놓았다. “레닌도 마르크스도 과오는 있었다. 따라서 우리도...”라는게 마오쩌둥의 변()이었다.

 

한편 대약진운동은 1966 초에 일어난 문화 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대약진은 제2 세계대전의 전체 사망자수(3000만 명~50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전쟁 한 번 없이 굶어 죽게 함으로써 경종을 울리며 끝이 났다.

 

악명 높은 토법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