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맹산군의 이야기에서 감탄고토(甘呑苦吐)를 생각하다.

산풀내음 2017. 8. 1. 23:11


휴가 중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걸리 한잔에 흥건하게 취해 운전은 아내에게 맡기고 web surfing을 하다가 다시 읽게된 맹상군 이야기. 예전에는 이야기 속에서 '계명구도(鷄鳴狗盜)'교토삼굴(狡兎三窟)’을 생각했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머리를 스쳐 가슴에 와 닿는다.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맹상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한 충성까지 맹세했던 수많은 식객들이 맹상군이 왕의 시기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썰물 마냥 모두들 그를 버리고 떠났다. 별볼일 없다고 생각한 풍환과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받은 설읍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은 떠났고 어쩌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은 격이다.

 

맹상군의 경우와 같이 내가 정성을 다해 도움을 주었지만 정작 내가 도움이 필요한 때 하지만 내가 더이상 줄 것이 없을 때 차갑게 외면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 수 있기에 세상의 인심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의 이치(理致)라 할 수 있겠지만, 막상 현실에서 믿었던 사람에게 버려짐을 경험하면 누구라도 비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좋은 사람과의 좋은 인연을 맺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누구에게 마음을 다해 도움을 줄 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필요할 때 상대도 최소한 십분지 일이라도 나를 위해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더이상 없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냥 돌아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음을 바친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실망과 원망은 더 크게 된다. 어쩌면 풍환의 말처럼 얻을 것이 없을 때 떠나가는 것이 세상이 이치라 할지라도 ...

 

"부자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고 가난하게 되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침 시장에는 사람이 있지만 날이 저물면 사람이 드물게 되는 것은 파는 것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관계를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일까? 

정답을 알지도 못하고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믿었던 사람에게서 외면을 경험한 후로는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도움을 주는 것이 현명하게 살아가는 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때, 친구가 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 없어도 되는 수준을 그냥 준다는 생각으로 주었을 경우, 나중에 반대의 입장에서 거절받았을 때 그 충격이 덜할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조차도 인간관계에서의 실망과 원망을 '남을 나의 입장에서 동일시'하는 잘못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법륜스님의 가르침대로 '실망과 원망의 원인을 '남에게 100%라는 기대를 한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관계에 정답은 있는 것일까요?  



 

사마천 사기의 맹상군 편

 

맹상군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위왕(威王)의 막내아들인 전영(田嬰)의 서자로 태어났고 이름은 전문(田文)이다. 맹상군은 그가 죽은 다음에 받은 이름, 즉 시호이다.


 

아버지인 전영은 여자 노비를 많이 두었고 그들을 통해 아들만 무려 4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전문 역시 그런 노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런데 당시 제나라의 미신에는 5 5일에 태어난 아이는 집안에 불운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전영은 전문을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미는 차마 아들을 버릴 수가 없어 몰래 길렀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전영이 크게 노하자, 그의 어머니는 전문을 아버지 전영에게 데려갔다. 그때 어린 전문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물었다.

 

전문 :  “아버지께서 저를 버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영 :  “속설에 따르면 5 5일에 태어난 아들이 키가 문만큼 자라면 부모를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전문 :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까? 문에 달려 있습니까?”

 

전영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

 

전문 : "사람의 운명이 하늘에 달렸다면 어차피 아버지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고, 만약 문에 달렸다면 문을 높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총명한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문은 크면서 점점 영리해졌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전문 : "아들의 아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영 : “손자라고 한다

전문 : "그럼 손자의 손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영 : “현손자라고 한다.”

전문 : "그럼 현손의 현손은 무엇입니까?”

전영 : “그건 모르겠구나.”

 

그제서야 전문은 자기가 하고 싶던 말을 했다.

 

“아버지께서는 천만 금이나 되는 부를 쌓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밑에는 어진 선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정말 이상합니다. 아버지의 첩들은 아름다운 비단옷을 질질 끌고 다니고, 아버지의 하인들과 첩들은 쌀밥과 고기를 실컷 먹지만, 선비들은 짧은 바지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쌓아 둔 것이 남아 도는데도 자꾸 더 쌓으려고만 할 뿐나라가 점점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시니 정말 이상합니다. 이름도 모를 후손을 위해 돈을 쌓을 일이 아니고 그 돈으로 나라의 힘이 될 인재들을 불러 모아야, 나라를 더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

 

전영은 크게 깨닫고, 전문에게 집안일을 돌보게 하고 식객을 접대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자 전영의 집에는 식객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전문은 그 사람들의 신분이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정성껏 대접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식객들은 필요할 때 전문의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수가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3,000명이라고도 한다. 식객이란밥을 먹는 손님이란 뜻인데, 단순히 밥만 먹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협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학문이든 무술이든 지혜든, 나름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주를 발휘하여 자기를 먹여주는 사람에게 보답했으니까 그 자체로 그이 명망을 높이고 자산이 되었다.

 

전문의 명성이 더욱 높아져 진나라 소양왕이 전문을 진나라로 초빙하여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진나라의 초빙에 응한 전문은 진으로 들어갔으나, 어떤 이가 소양왕에게전문이 이 시대의 일류 인재임은 분명합니다만 제의 사람으로 진의 재상이 되어도 제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돌려보낸다 해도 진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진언했고, 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여 전문이 머무르던 저택을 포위하여 전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전문은 진나라 왕이 아끼는 첩 연희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풀어주도록 부탁했다. 그때 그 첩은 여우의 거드랑이 흰 털만 모아서 만든호백구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여우 1만 마리가 필요할 정도로 희귀한 호백구를 이미 진나라 소양왕에게 바친 후였기에 난감해 했다.

 

고민에 빠진 전문은 식객들에게 대책을 물었지만 아무도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때 맨 마지막에 앉아있던 사람이 자신이 호백구를 구해오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은 개 흉내를 내며 남의 집에 숨어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나라 궁궐에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 돌아왔다. 이걸 받은 첩은 왕에게 부탁들 하자 결국 왕은 전문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소양왕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문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한밤중에 국경에 도착한 전문 일행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였다. 관문은 밤이라 닫혀 있었고 아침이 되어 닭이 울 때까지는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마음이 바뀐 소양왕은 추격병을 보낸 상황이었다.

 

언제 진나라 왕의 군대가 쫓아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문의 마음은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그때 식객 한 명이 닭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닭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이로서 전문 일행은 국경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전문 일행이 관문을 빠져 나온 후 한 식경쯤 지나자 과연 진나라의 추격병들이 함곡관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문이 이미 떠난 후라 할 수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평소 학자와 무예가 등의 식객들은 전문이 도둑질, 흉내의 재주밖에 없는 같은 사람까지 식객으로 받아들이는 전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이때만은역시 사람은 쓸모가 있다라며 전문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이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전문의 심복이 되었다.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전문에 대한 그런 존경이 때로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진나라를 벗어난 전문 일행이 제로 돌아가는 길에 조나라의 어느 마을에 들렸을 때의 일이다. 전문의 소문을 일찍부터 듣고 있던 조나라 사람들이 전문을 보려고 길에 몰려 나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막상 전문의 얼굴을 보니 자기들이 생각하던 인상과 달랐다. 키 큰 사내 대장부인줄 알았더니 불면 날아갈 듯한 작은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조롱하자 전문이 크게 화를 냈다. 그러자 수레에 타고 있던 전문의 식객들이 뛰어 내려 칼을 빼 들고 그 자리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을 죽여 버린 것이다. (다만 이 일화는 사실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귀국한 전문은 제의 재상이 되었다. 어느 날 풍환이라는 식객이 찾아와 가진 재주가 없지만 선비를 좋아하신다면 이 한 몸 당신께 맡긴다고 하였다. 풍환은 1년 내내 밥만 먹고 빈둥거리고 놀았다. 당시 전문은 3천명의 식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자기 영지(領地, 제후를 봉할 때 내리는 땅)에서 나오는 세금만으로 사람들을 다 먹이기 힘들어서 돈놀이를 시작했다. 마침 하는 일 없던 풍환을 이자를 걷는 책임자로 영지 설읍(薛邑)에 보냈고 이자를 다 받으면우리 집에 부족한 것을 사오라고 당부하였다.

 

풍환은 사람들로부터 이자를 10만 전이나 거두었는데 그 돈으로 술과 고기를 사서 백성들에게 연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이자를 내지 않은 자들에게 상환 가능 여부를 물었고 상환 가능한 사람들은 기한을 연장해 주었고 아주 가난해서 이자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돈 빌린 문서를 달라고 해서 불질러 버렸다. 백성들이 전문에게 감사해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도성에 돌아온 풍환에게 전문은 받은 이자로 무엇을 사왔는지를 물어보았다. 풍환은 자초지정을 아룀과 더불어분부대로 공자님의 댁에 없는 것을 사왔습니다. 소인이 보건대 공자님의 댁에는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오직()’가 부족한 것 같아서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전문은 풍환에게나는 식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놀이를 하였는데, 빌린 백성들이 이자조차 내지 않아 선생을 파견했던 것인데 선생은 그 돈을 즉시 받아 술과 고기를 사는데 써버리고 돈 문서까지 불살라 버렸다 왜 그랬냐?”고 묻자,

 

“술과 고기 없이는 돈 빌린 사람들을 다 불러들일 수 없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또 사람들을 모으지 않으면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를 알아내기 힘들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여유 있는 자는 날짜를 정해주어 이자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진짜 가난한 자에게는 돈 문서 10년을 갖고 있어도 돈 받기 힘들고 성급하게 독촉하면 달아날 뿐 만 아니라 원망까지 할 것이며, ‘전문은 돈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성도 전문을 배신하는 빚을 내지 않는다는 악평이 퍼져 전문의 명성도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받아낼 전망도 없는 증서 대신에, 영지 백성들에게 은혜를 팔아 천하에 전문의 덕의 높이를 알린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여기에는 전문도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전문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지자, 새로 즉위한 제나라 민왕(湣王)은 전문을 벼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자 풍환을 제외한 그 많은 식객들도 그의 곁을 떠났다. 전문은 어쩔 수 없이 봉읍지인 설읍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설읍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백 리 밖까지 나와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광경을 본 맹상군은 크게 감동했으며 풍환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자네가 사왔다는를 이 눈으로 보게 되었네.”

 

바로 여기서 풍환은꾀 있는 토끼들은 굴을 세 개씩 파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설읍은 굴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굴 하나로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소인이 굴 두 개를 더 파놓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한다.

 

당시 전문은 여러 나라를 통해 매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던 인물이었고, 각국은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인재를 목마르게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풍환은 수레 50()과 금 500근을 가지고 위나라 수도인 대량(大梁,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으로 가서 양혜왕(梁惠王, 재위 BC.370~BC.318)을 설득했는데, 누구든지 먼저 전문을 얻기만 한다면 부국강병을 이루어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다. 양혜왕은 즉시 원래의 재상 조거(調去)를 대장군에 임명하는 한편, 황금 1천근과 수레 100승을 보내 맹상군을 재상의 직으로 초빙했다.

 

풍환은 양혜왕의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돌아와 이 사실을 전문에게 알렸고, 양혜왕의 초빙을 거절할 것을 제안하였다. 양혜왕의 사신이 세 차례나 전문을 찾아왔으나 전문은 풍환의 꾀에 따라 한사코 초빙을 거절했다. 제나라 민왕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혹 전문이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어 서둘러 많은 재물을 내려 전문을 중용했다.

 

여기서 풍환은 전문을 위해 또 하나의 예비 조치를 건의했다. , 제나라 민왕으로 하여금 선왕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기를 설 지방에 종묘를 세워 모시도록 하게 한 것이다. 이로써 전문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굳어졌다.

 

종묘가 완성되자 풍환은 비로소 전문에게 이제 세 개의 토끼 굴이 모두 완성되었으니 발 뻗고 편히 주무시라고 했다. 쓸쓸하고 고단한 신세에 처했던 전문이 풍환의 꾀로 정치적으로 보다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란꾀 있는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다.’는 뜻으로, 바로 전문(맹상군)의 이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전문이 제의 재상으로 복직하자 풍환은 떠난 식객들을 불러들이도록 진언했다. 전문은내가 복직한 것은 오직 자네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네. 내가 재상에서 파면된 것을 보고 떠나간 놈들을 어떻게 다시 불러들이라는 건가?”라고 화를 냈고, 풍환은 다시 그들은 공이 빈궁해서 떠났을 뿐입니다. 부자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고 가난하게 되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침 시장에는 사람이 있지만 날이 저물면 사람이 드물게 되는 것은 파는 것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식객들이 떠나 버린 것도 당신 개인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이래서는 생활할 수 없겠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전문도 납득하고 떠난 식객들을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