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강원

월정사, 상원사 그리고 사자암 적멸보궁

산풀내음 2018. 5. 2. 21:21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순례의 세번째로 오대산을 다녀왔다. 신라 자장율사가 공부하던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하여 그리고 호령봉, 비로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5개의 봉우리가 있다하여 오대산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동서남북중 각각에 5개의 암자, 즉 동대에 관음암, 서대에 염불암, 남대에 지장암, 북대에 미륵암 그리고 중대에 사자암이 있다고 하여 오대산이라고 한다. 오대산에는 석가모니의 진골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 외에도 8각9층석탑으로 유명한 월정사가 있으며 국내 문수신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상원사가 있다.

둘러볼 곳이 많아 새벽 4시부터 서둘렀다. 6시 반쯤 월정사에 도착하여 먼저 전나무숲을 거닐었다. 주차장에서 약 1.9km의 순환로로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의 선재길과는 또 다른 멋을 지닌 곳이다. 일주문에서 월정사까지 계곡을 끼고 놓여진 숲길인데 계곡 반대편에도 작은 숲길을 만들어 순환로 형태로 되어있다. 마치 통도사 소나무숲길인 무풍한송로와 흡사한 느낌이랄까? 전국적으로 이세먼지가 다소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숲길이라서 그러한지 아침 이슬을 머금은 전나무 향내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숲길이 워낙 평탄하고 잘 정비되어 있어 30-40분 정도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전나무 향내를 뒤로하고 월정사로 올라 갔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된다. 자장은 중국으로 유학하여 산서성 오대산의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이때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전해준 뒤, 신라에서도 오대산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게 된다. 이후 귀국하여 찾게 된 곳이 강원도 오대산이며, 이때 월정사를 창건하고 오대 중 중대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하게 된다.(월정사 Home page에서) 

이른 아침이라 한가하고 조용하다. 화려한 연등의 행렬을 지나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해 준 것은 국보 48호인 팔각구층석탑이었다. 석탑의 앞에는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생의 모습을 한 국보 139호의 석조보살좌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적광전이 있었다. 통상 석가모니불을 모시면 대웅전이라 칭하고 적광전이라고 하면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것이 통상적인데 월정사는 적광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이는 화엄과 문수도량의 중심이라는 점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리고 월정사 적광전은 협시불이 없는 것이 다른 곳과 달랐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면 협신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는데 이곳은 석가모니불만 모시고 있었다. 이는 인근에 있는 상원사에 문수전을 두어 문수보살을 따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 아닌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월정사를 둘러보고 상원사로 이동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었다. 선재길을 따라 9km 정도를 걸어가는 것과 8시 45분 경에 월정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상원사에서도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적멸보궁과 비로봉까지는 각각 2km와 3.5km의 산길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해 선재길은 돌아오는 길로 미루었다. 상원사로 가는 첫차라서인지 버스 승객은 우리 부부와 운전하는 분을 포함 6-7명이 고작이었다. 오랜만에 타는 시골 버스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맛은 매우 색달랐다. 약간의 덜컹거림은 불편보다는 추억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9시 조금지나 상원사에 도착하여 바로 비로봉을 향했다. 상원사, 중대 사자암을 지나 적멸보궁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1.5km만 더가면 오대산 정상 중에 하나인 비로봉이었다. 그런데 허걱... 적멸보궁에서부터 비로봉까지 입산이 5월 15일까지 통제되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쉬웠다. 체력 비축을 위해 월정사에서도 부처님께 간단하게 삼배만 올리고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도 버스로 이동하였는데 ... 아쉬운 마음을 뒤고하고 적멸보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해야 하나, 때마침 적멸보궁에서는 사시기도 중이었고, 너무나도 고맙게도 문앞에 계시던 행자스님께서 우리 부부를 안으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 부부가 법당에 들어서니 더이상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법당은 꽉 차게 되었다. 사실 오대산에 오기 전에 월정사에서 1박을 하면서 새벽예불을 드리고 싶었지만 관련 시설이 수리 중이라 포기하고 당일로 일정을 조정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이 통제되어 적멸보궁에 먼저 들리게 되었고 내가 원했던 스님들과 함께 하는 예불을 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했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기존에 다녀왔던 통도사와 정암사의 적멸보궁과는 조금 달랐다. 두 곳의 적멸보궁이 사찰 내 위치하며 사찰에서 중심 법당의 위치에 있다고 하면 오대산의 적멸보궁은 독립된 별도의 법당으로 지어져 있다. 상원사에서 약 2km 그리고 중대의 사자암에서 약 700m 떨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오대산 적멸보궁을 일러 상원사 적멸보궁이라고 하는데, 혹자는 상원사 윗쪽 그러니까 적멸보궁과 상원사의 중간쯤에 있는 중대 사자암을 적멸보궁의 수호암자라고 하면서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이라고도 하는 등 호칭에 다소 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뿐만아니라 상원사와 중대 사자암의 본사가 월정사이고 월정사의 입장에서는 두 곳 모두 산내 암자에 해당하기에 월정사 적멸보궁이라고 하는 것도 가능한 듯하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니 11시가 조금 지났다. 행복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대산 적멸보궁에 연등을 올렸다. 내려오는 길에 사자암에 들려 점심공양을 하고 상원사로 갔다. 신라 33대 성덕왕 4년(705)에 보천, 효명 두 왕자에 의해 세워진 상원사는 문수성지의 중심지라 있다. 특히 상원사에는 문수보살과 세조의 유명한 설화가 있다.

중대 사자암에서

중대 사자암의 모습


문수보살님과 세조의 이야기


조선왕조 7대 왕인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는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이다. 그가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였지만 심리적으로는 상당한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이 국가의 사상적 기반인 조선왕조의 왕인 그가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 불리며 불교를 숭상한 것도 불법의 공덕으로 자신의 죄를 씻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세조는 원혼 때문에 자주 고통을 받았으며 아들인 의경세자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의 원혼에 시달려 죽어버렸다. 또한, 세조도 현덕왕후가 나타나 저주를 퍼붓고 침을 뱉는 꿈을 꾸고는 악성 피부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며 썩어가는 무척 고통스러운 병이었으며 명의와 명약으로도 전혀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몹쓸 질병에 걸린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통감하였다. 그리하여 세조는 모든 정사(政事)를 접고 부처님께 참회의 기도를 올리려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오대산으로 향하였다.  

상원사(上院寺)에서 정성으로 기도하던 어느 날, 세조는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동자가 있어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자가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니 동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공력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때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제120호 신성불보살 이야기 :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발췌 : 

http://webzine.idaesoon.or.kr/board/view_win.asp?bno=4459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된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을 둘러보고 문수전으로 향했다. 문수전에는 국보 221호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木造文殊童子坐像)이 모셔져 있다. 이 동자좌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제작된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최근에 이 동자상 안에서 복장 유물이 나왔고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년)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가 분명한데다 왕실 발원으로 제작된 드문 사례라 조선 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동자상은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머리를 하고 있다. 도톰한 볼이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운 표정을 만든다.

이젠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해야 하나. 문수전에 들어서니 문수보살에 대한 예불 중이었다. 한번도 아니라 두번씩이나 내가 원했던 예불에 동참할 수 있어 몸과 마음은 하늘을 나는 듯 가볍고 기뻤다. 예불 후 108배를 더 올리고 연등 공양도 하였다. 







상원사를 나온 시간은 2시 30분 경.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계곡을 따라 조성된 '선재길'로 향했다.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의 9km. 산길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걷기 시작했다. 봄철치고는 수량이 풍부해서인지 콸콸거리며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더욱 경쾌했다. 울퉁불퉁 돌길에 조금 지치려고 하면 잘 딱인 흙길이 나온다. 흙길이 지겨워질려고 하면 나무로 잘꾸며진 길이 나온다. 숲속의 풍광은 수시로 변화한다. 지겨울 틈이 없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통도사의 무풍한송로에 비유한다면 선재길은 해인사의 소리길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해인사의 소리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선재길은 고도의 차이가 거의 없어 오르고 내림이 거의 없이 평지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리길과 선재길 모두 계곡을 끼고 나 있지만 소리길은 계곡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선재길은 어디에서든 계곡에 내려가서 계곡물에서 가벼운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재길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유유자적 내려오니 월정사에 도착한 시간이 5시 30분 즈음. 문수보살님을 친견한 듯한 즐거움을 가슴에 담고 서울로 돌아오니 이 기쁨은 실로 표현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