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강원

무산스님과 설악산 신흥사_20180623

산풀내음 2018. 6. 26. 20:47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로 살다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이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신 무산 스님의 설악산 신흥사를 다녀왔다.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셨고, 1939년 8살의 어린 나이에 성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다. 그리고 스님은 1968년 속명인 조오현으로 ‘시조문학’에 등단해 불교계 대표 시조시인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오현 스님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고 이 또한 입적하신 후 신문기사를 통해 안 것들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살아 계실 때도 생사일여, 생사를 초탈한 분이셨으니 ‘허허’ 하시며 훌훌 떠나셨을 스님께 막걸리 한 잔 올린다”며 무산 스님에 대한 추모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셨고, “언제 청와대 구경도 시켜드리고, 이제는 제가 ‘막걸리도 드리고 용돈도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얼마 전에 스님께서 옛날 일을 잊지 않고 ‘아득한 성자’ 시집을 인편에 보내오셨기에 아직 시간이 있을 줄로 알았는데, 스님의 입적 소식에 ‘아뿔싸!’ 탄식이 절로 나왔다”라는 말씀에서 그 분에 대한 애틋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직접 만나뵐 수는 없지만 신흥사 명부전에 모셔진 스님의 사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난 스님의 환한 웃음에서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존재하는 모든 상(相)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이 상이 아님[非相]을 안다면 바로 여래(부처)를 보리라.)의 깨닫음을 볼 수 있었다.


서둘러 설악산에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설악동 탐방소 앞은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둘러보고자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당연히 신흥사 본사가 최우선이지만 신선이 하늘로 올라 갔다는 비선대와 그 앞 우뚝 솟은 미륵봉 중턱의 금강굴, 한 명이 흔들어도 백 명이 흔들어도 살짝쿵 흔들리기만 한다는 흔들바위와 그 바위가 있는 계조암, 울산에서 금강산에 가려다고 중간에 멈춰섰다는 울산바위 등등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신흥사 일주문을 지나면 통일대불이라는 청동 불상이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다. 이 청동 불상은 높이 14.6m의 석가모니불로 1987년 8월 공사를 시작해 1997년 10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통일대불을 지나 왼쪽으로 계곡과 함께 나있는 길을 따라 호젓하게 걷다보면 숲 사이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설악의 기암절벽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여름을 재촉하는 듯한 매미소리와 잔잔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취해 있다 보면 마고선(麻姑仙)이라는 신선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비선대에 도달한다. 

통일대불


비선대 앞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미륵봉이라는 기암절벽이 우뚝 솟아있고 그 중간에 작은 석굴이 보인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보면 천불동(千佛洞) 계곡의 아름다운 자태를 느낄 수 있다. 천불동을 뒤로하고 금강굴로 향했다.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 오르다 보면 철제 계단이 나온다. 순간 '철제계단'이 없었을 때에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을 오를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한번에 철제계단을 그냥 올라갈 수가 없다. 너무나도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중간중간에 느껴지는 설악산 풍광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눈 앞에 놓여져 있는 아름다움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 셔트를 연이어 눌렀다.


비선대에서 바라다 본 금강굴

암벽 타기를 즐기고 있는 산악인들



금강굴에 도달하니 스님께서 우리를 반겨 주신다. 미륵봉 중턱에 나 있는 작은 석굴은 길이 18m, 면적은 약 23.1㎡이다. 언제 형성된 굴인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지며, 원효대사가 쓴 《금강삼매경론》에 따라 금강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굴에 모셔진 부처께 예를 올리고 나오니 스님께서 석굴 작은 틈 사이로 한 방울 한 방울씩 모인 물을 우리에게 권하신다. 한 모금의 물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Tip) 신흥사에서 와선대를 지나 비선대까지는 편도 2.3km로 워낙 평탄한 길이라 40분 정도면 충분하다. 비선대에서 금강굴까지는 약 700m이지만 소요 시간은 신흥사에서 비선대까지 가는 시간과 비슷했다.


금강굴에서 내려와 울산바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신흥사를 거쳐 흔들바위가 있는 계조암으로 향했다. 신흥사를 막 지나면 안양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나온다. 법당의 기둥에 한글로 '여래의 한량없는 그 모습 모든 중생들 안락케 하는 캄캄한 번뇌 없애버리고 온갖 것 두루두루 비치며'라는 글이 걸려있다. 오른쪽 뒤편으로 달마대사의 모습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달마봉이 멋진 풍경을 만든다. 조금 더 올라가면 내원암이 나오고 곧 이어 울산바위가 있는 계조암이 나온다. 신흥사에서 계조암까지는 2.1km로 시간은 50분 정도 잡으면 될 듯하다. 

계조암은 목탁바위를 뚫고 지은 석굴사원이다. 652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석굴 앞 쌍룡바위가 대문 역할을 하고, 식당암은 소가 누운 모양의 반석으로 백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평평하다. 계조암 앞에는 밀면 흔들리지만 떨어지지는 않는 바위인 흔들바위가 있다. 흔들바위는 원래 쇠뿔처럼 2개였는데 풍수지리가가 불가의 영기가 넘쳐흐름을 시기하여 1개를 굴려 떨어뜨렸다고 전해온다.


석굴사원에 모셔진 아미타불께 예를 올리고 울산바위로 향했다. 거리는 1km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아름다움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만만한 길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계단에 몸은 지치지만 그래도 거대한 수직암릉인 울산바위를 만나게 되면 시원한 설악의 바람과 함께 지쳤던 기억은 사라진다. 

1983년 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가 발행한 <한국의 발견> 강원도 속초시 편에는 울산바위 전설이 소개돼 있다.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전국의 잘 생긴 바위를 모두 금강산으로 모이도록 했는데, 경상도 울산에 있었던 큰 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길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느림보 걸음걸이다 보니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금강산은 모두 다 만들어진 후였다. 눈물을 머금고 이 바위는 금강산에 가보지도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그대로 주저앉았다는 내용이다.


내려오는 길에 계조암에 다시 들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바위에 누워있었다. 가끔 하늘을 쳐다 보았다. 이것이 행복이다.

40분 정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신흥사로 왔다. 신흥사는 삼국시대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이 향성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하였으며, 화재로 불타버린 후 의상이 능인암터로 옮겨 중건하면서 선정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000년 동안 번창하다가 인조 때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산 스님께서 조실로 추대되어 2011년부터 머물다 떠나신 신흥사는 생각보다 아담한 사찰이었다. 관광객들이 다 떠난 후라 그런지 내가 방문한 오후 4시의 신흥사는 깊은 산속의 산방과 같이 조용했다. 

천왕문을 지나면 사찰에서 설법을 강의하거나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인 보제루가 나온다. 그 아래로 주불전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을 만들었는데 높이를 의도적으로 낮게 만들어 낮은 자세와 마음을 갖도록 하고 있다. 이 길을 통과하면 주불전이 극락보전이 나온다. 그리고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과 조사당이 배치되어있다.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에서는 무산 스님의 환한 웃음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