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강원

봉정암 가는 길.... 2) 봉정암에서 부처를, 오세암에서 관음보살을 ...

산풀내음 2018. 5. 23. 22:08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주는 기도 성지’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듯, 실제로 봉정암은 대단히 험지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신도들로 북적거리는, 영험 있는 암자로도 이름이 높다. 


봉정이란 봉황의 이마라는 뜻이다. 자장율사께서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온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9층석탑에 우선 봉안했다.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신령한 장소를 찾았고, 먼저 금강산에 올라 기도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이레째 되는 날, 갑자기 하늘이 환해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봉황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더니 봉황새는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더니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라진 그 곳은 부처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용아장성은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자장께서 자세히 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장께서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할 곳이라 판단했다.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한 뒤 5층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해서 봉정암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 때의 일이다.

봉정암에 도착해 간단히 몸을 추스르고 아내와 함께 '봉정암 석가사리탑'으로 향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석가모니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사찰의 여느 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고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뛰어난 아름다움이 있는 탑은 아니지만 설악산을 두루 내려다 볼 수 있는 암석 위에 우뚝 쏫아 있는 이 석탑은 그 자체에서 경외로움이 풍겨나오고, 비바람에 깍인 듯한 흔적과 군데군데 푸르스름한 빛깔 속에서 세월의 흔적과 함께 엄마의 품과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다.


아내와 기도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뉘엿뉘엿 지는 해와 함께 눈으로 들어오는 풍광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다. 오세암 쪽으로 나 있는 봉우리에 살포시 걸쳐 있는 구름들의 모습에서 신선들이 노는 곳이라는 착각에 빠져든다. 그리고 지는 해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산들의 모습에서 피안의 세계가 바로 내 앞에 놓여져 있는 듯하다. 피로는 눈 녹듯 녹아내린다. 그리고 그 동안 분하고 억울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리는 듯 했다.


숙소에 들어갔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작은 방에 족히 20명이 넘는 분들과 함께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봄에 잠이 들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숙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불뇌보탑의 모습에 이끌려 새벽 2시 조금 지나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불뇌보탑의 경외로움도 수많은 별들로 채워져 있는 봉정암의 하늘도 카메라에 담아두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보살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곧 이어 저편에서 스님의 독경 소리와 함께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새벽 예불 전에 도량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하는 도량석(道場釋)이 시작된 것이다. 


3시에 새벽예불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었다. 서둘러 새벽예불이 있는 적멸보궁으로 향했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법고(法鼓)의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곧 이어 목탁소리와 함께 새벽예불이 시작되었다. 반야심경, 천수경에 이어 석가모니불 정근이 이어졌다. 나도 아내도 그리고 예불에 함께한 다른 모든 불자님들도 간절한 마음으로 석가모니불을 외쳤다. 멀리서 보이는 '불뇌보탑'을 향해 ....

새벽예불에 참가해 본 것은 대학 졸업 이후 처음인 듯하다. 무려 30년 만에 느껴보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것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봉정암에서의 새벽 예불이라 더 의미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나뿐만 아니라 새벽예불에 참가한 모든 불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아침 공양을 간단히 하고 서둘러 관음성지로 유명한 오세암으로 향했다. 깍아지른 듯한 길을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 시작은 향후 내게 올 심상치 않음의 예고였다. 돌로 가득한 좁은 길에 더하여 만만하지 않은 경사는 초보 등산객에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작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청아한 물 소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1.5km 정도 내려왔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큰 냇물 여러개가 합치는 지점이 나온다. 순간 이제부터는 편한 길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는 헛된 망상이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4-5 정도의 산봉우리를 넘어야 겨우 오세암에 도달할 수 있다. 아내의 입에서 지쳐가고 있다는 신음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어제의 일정 그리고 오늘 새벽 예불 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관세음 보살님의 품안에 안기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11시 즈음 오세암에 도착했다. 봉정암에서 오세암까지의 4km를 4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비록 하산 코스이지만 쉽게 속도를 허락하는 코스는 아닌 듯했다. 조금 속도를 낸다고 해도 3시간 30분 정도 아닐까 한다. 오세암에 도착하면 그 동안의 피곤함은 싹 풀린다. 산으로 둘러쌓인 오세암은 엄마의 자궁 속과 같은 아늑함을 준다. 어쩌면 관세음보살께서 세상의 피로에 지친 우리를 자비의 마음으로 끌어안아주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듯하다.


오세암은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지었고, 그때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자장율사가 관음조의 인도를 받아 관음봉 아래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도량을 일으켜 관음암이라 칭했단다. 앞은 사자봉이요 뒤는 칠성 병풍암이다. 오른쪽 오세폭포와 만경대, 왼쪽 마등령과 나한봉이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면 연꽃이 활짝 핀 모양새였다. 연꽃 안에 가만히 암자 하나 덩그러니, 오세암이다. 김시습이 삭발출가한 곳도 오세암이고 만해 한용운 스님이 39세였던 1917년 의심 덩어리를 푼 곳도 오세암이었다.

​다섯 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오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때는 조선 인조 1643년, 설정(雪淨)스님의 다섯 살 조카가 양친을 여의고 오세암에 머물고 있었다. 해가 몹시 짧은 늦가을 스님은 겨우내 먹을 양식을 구하러 양양에 가야만 했다. 스님은 워낙 길이 험해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불러 놓고 몇 번이고 다짐을 했다. "절대로 절 밖으로 나가지 말거라. 무섭거든 관세음보살을 큰 소리로 불러라." 총명한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는 듯 목탁을 추겨 들었다.


양양에 도착한 스님은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아 다시 오세암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날이 어두워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스님은 양양 신도 집에서 뜬 눈으로 하룻밤을 지새우고 새벽닭이 울자 부랴부랴 걸망을 챙겨들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밤새 눈이 내려 마당이 한길 눈으로 덮여 있었다.  

스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야속한 눈은 그 뒤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갔다. 눈에 생기는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혼자 있는 동자에 대한 걱정으로 스님의 애간장은 점점 녹아내릴 듯 간절하다 못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 워낙 많이 쌓인 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엄동설한 폭설에 혼자 남겨둔 조카가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만이 화두처럼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스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부처님께 조카의 무사를 서원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일뿐이었다.

이렇게 고통스런 몇 며칠을 보내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관음암으로 돌아가려 하니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말렸다. '이러한 폭설에 길을 나서면 죽을 게 뻔한데 왜 가려고 하느냐'며 적극 만류하여 결국 스님은 눈길이 트일 때까지 신흥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도 무정한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눈이 녹아 산길이 트이게 되었다. 서둘러 바랑을 챙긴 스님은 뜀박질을 하듯 달려 암자에 들어섰다. 암자에 들어서니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조카가 살아 있다는 반가움에 스님은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어찌된 것이냐고 물으니 조카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라고 답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환한 백의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창공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놀란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 전에 큰절을 올리고 조카를 안아 보려 하자 품에 안기지도 않은 채 조카는 그대로 사그라져 승천을 하였다 한다. 

나중에 살펴보니 법당 경상에 놓여 있던 책장이 스님이 집을 비운 딱 그만큼의 날짜만큼 찢겨져 나가 있었다.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종이 한 장으로 그날 하루를 지내게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모든 것을 목격한 설정 스님은 다섯 살 어린 조카가 맑고 무구한 마음으로 삼촌인 스님이 시키는 대로 무념무상의 '관세음보살'을 계속하자 관음보살이 감응하고 그 가피로 영생불멸의 길로 접어든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5살밖에 안 된 동자였지만 그 순진무구한 마음이 동자를 성불케 하였으며 이 도량에 관음보살의 영험이 있음을 길이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오세암에서 간단하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관음보전에 예를 올린 후 영시암으로 향했다. 오세암에서 영시암으로 가는 길도 쉬운 길은 아니지만 이전에 비하면 거의 평지나 다름 없다고 할 것이다.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 중에 오세암을 거치는 길은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다. 그래서 혼자서 사색하면서 걷고자 하는 순례자들에게 좋은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세암에서 영시암까지 2.5km에 약 2시간 조금 못미치는 시간이 걸렸고, 영시암에서 백담사까지 3.5km도 2시간 정도 걸렸으니 봉정암에서 백담사까지는 도보시간만 총 8시간이 걸린 셈이다.

돌아오는 길 내내 힘들다고 했던 아내가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보, 올 가을에 한번 더 오자"라고 한다. 



1편)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다.

http://blog.daum.net/gmania65/1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