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전북

아들과 함께 한 여행, 익산 숭림사와 군산 동국사 그리고 ... (1)

산풀내음 2018. 6. 18. 21:41

7월 군 입대를 앞둔 아들 녀석이 종강을 하였다고 하여 서울로 데리고 올 겸해서 전주로 내려가 인근 익산과 군산을 여행했다. 여행 일정은 전북대에서 아들 녀석을 Pick-up해서 익산의 두동편백숲과 숭림사를 둘러보고 군산으로 이동해 진포해양테마공원 인근 지역, 특히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를 관광하고 선유도에서 석양을 보는 것으로 잡았다. 특히 군산에서는 짬뽕과 물짜장으로 유명한 복성루와 팥빵으로 유명한 이성당도 당연히 반드시 둘러볼 List에 포함시켰다.

9시쯤 전북대 교정에 들어서니 아직 기말고사가 남은 듯한 학생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월드컵 경기에 밤을 샌 아들 녀석은 피곤한 기색으로 기숙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녀석의 짐들을 가득 싣고 모처럼 느껴보는 시골길의 한적함과 함께 피토치드가 가득한 편백 숲에서의 힐링을 생각하며 첫 목적지인 두동편백마을로 향했다. 시골 마을치고는 단정하게 가꾸어진 듯한 두동편백마을의 첫 느낌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편백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팬션과 무인 찻집 또한 마음에 쏙 드는 부분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두동 편백마을 편백나무 숲은 식재한지 35년 이상 된 편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백제의 숨결 익산 둘레길과 연결되어 있어 걷기에 푹 빠진 도민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특히, 편백나무는 식물이 균이나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내뿜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한데, 해충에게는 유독한 이 물질이 사람에게는 유익해 우리 인체에 세로토닌 호르몬 분비와 함께 알파파 뇌파를 자극시켜 심신을 안정시키고 건강한 자연에너지를 충전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하지만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우리 가족 3명 외에는 다른 관광객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생각보다는 작은 숲의 규모에 다소 실망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도시 생활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편백나무숲 아래에서 준비해 간 과일을 먹으며 한참을 그냥 그렇게 있었다.


우리가 두번째로 찾아간 곳은 해발 240m의 나지막한 함라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숭림사였다. 숭림사(崇林寺)의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 경덕왕(재위기간, 742~764)때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반면 숭림사 보광전에서 나온 기와 명문에 충목왕 때 행여선사가 선종사찰로 크게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와 공식적인 창건 연대는 이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숭림사와 충목왕의 왕비와 관련하여서는 파랑새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때는 1345년 고려 충목왕 때의 일이다. 왕궁에서는 충목왕의 왕비 몸에 난 등창으로 근심이 가득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여러 의원들이 병을 고치려 했으나, 등창은 갈수록 심해지고 왕비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왕비는 지난날의 일들을 회상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어느 사찰에 자신이 머무는 동안 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왕비는 그 사찰의 모습과 산세를 일러주며 절을 찾게 하였다.마침내 찾게 된 절은 지금의 숭림사였으며, 왕비는 숭림사에서 자신의 몸을 바쳐 관음보살에게 일주일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던 날, 기도 중 향긋한 향기에 취해 잠시 잠에 빠져든 왕비는 꿈속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자신의 몸에 난 등창을 핥아주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왕비는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등창을 살펴보니 깨끗이 나은 채 미묘한 향내음이 풍기는 것이었다. 이에 왕비는 관음보살께 눈물로 기도를 드렸으며, 병이 완치되어 궁궐로 돌아간 왕비는 그 이후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아 관음기도의 도량으로 삼게 되었다. 

숭림사는 그 이름과 관련하여서도 재미나다. '숭림사'의 명칭은 중국 소림사가 위치해 있는 숭산(崇山)의 숭(崇)과 소림사(少林寺)의 림(林)자를 따왔다고 전한다. 소림사는 달마대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9년 동안 벽을 바라보는 참선수행 끝에 창건한 최초의 선종사찰로, 숭림사의 창건은 소림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인 것이다.

숭림사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작은 내를 가로질러 나 있는 숲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면 숭림사 일주문이 나온다. 사실 일주문을 지나서도 주차장이 있지만, 가능하면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그곳에서부터 천천히 숲길을 즐기면서 세속에서 찌든 피로를 날려보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뒤 오른쪽 산자락에는 석불상을 모신 기도처가 있다. 미소 가득한 부처님께 합장으로 인사올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작고 아담한 사찰인 숭림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세심교라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차를 주차하면 된다


숭림사 앞을 흐르는 계곡에 놓인 해탈교(解脫橋)를 지나면 "崇林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우화루(雨花樓)가 나온다. 우화루를 옆으로 끼고 돌면 숭림사의 주불당인 보광전이 있다. 보광전 앞에는 최근에 조성된 5층 석탑이 있다. 그리고 보광전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는 정혜원과 지장보살님을 모신 영원전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보광전 뒷편으로 나한전이 있다.


천천히 사찰의 느낌을 가슴에 담으며 보광전에 도달하니, 보광전에서는 마침 어느 할아버님의 제(祭)를 지내고 있었다. 가족분들 모두 상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나도 그분의 극락왕생을 기원해 드렸다. 

해탈교 앞에서 바라본 숭림사


숭림사도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란의 피해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특히 정유재란과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뇌묵 처영대사가 의승병을 이곳에 집결시키고 왜군과 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숭림사는 항상 왜구들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이 많았던 숭림사는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전각들이 모두 소실됐으나 보광전만은 화를 면했다. 그 후 숭림사는 10년 만인 광해군 5년(1613)에서야 겨우 우화루(雨花樓)를 중건한 것으로 나타난다.

숭림사 보광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복장기문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 불상이다. 부처님은 결기부좌하고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가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 밑에 군의대가 있고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불상 위에는 용과 구름이 조각된 섬세한 닫집<寶蓋 보개>이 설치되어 있다.


숭림사 영원전 지장보살님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불상을 탐낸 일본인들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배가 출발하려고 할 때마다 태풍이 불거나 선장이 죽는 등 배가 움직일 수 없는 불길한 일들이 벌어졌다. 결국 일본인들은 불상을 군산항 보급창에 버리고 떠났다. 불상은 광복이 된 후에 한 선원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금칠이 다 벗겨져 시커먼 옻칠만 남은 지장보살에서 금빛이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장보살은 다시 숭림사로 돌아와 영원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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