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전북

변산국립공원을 찾아서 ... 1) 능가산 개암사

산풀내음 2018. 10. 2. 21:42

이번 여행은 변산국립공원이었다. 첫날은 개암사와 곰소염전, 둘째날은 내소사와 채석광, 적벽강을 둘러보았다. 개암사는 우리에게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사찰일 수 있지만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우금산성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변산반도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규모가 웅장한 사찰은 아니지만 내면에 중생구도의 큰 뜻이 보여지는 대찰이었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정함을 지니고 있는 참 기도도량이었다. 

백제부흥운동의 근원지였던 우금바위(울금바위, 우금암) 아래에 위치한 개암사(開岩寺)는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묘련(妙蓮) 왕사가 창건하였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岩)이라고 하였고 그 중에 개암의 궁을 사찰로 바꾼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암은 개암사에서 능가산 정상을 바라보면 큰 바위 두개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두 바위의 형상이 ‘바위가 문을 열고 있는 형상’이라 개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개암사 대웅전 뒤편으로 보이는 것이 우금바위이다.

개암사의 뒷편에 있는 우금바위의 주변이 우금산성이다. 울금산성 또는 주류성이라고 불리는 이 성은 660년 백제 의자왕이 부여를 빼앗겨 연합군에 투항하고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광복군이 왕자 '부여풍' 을 받들어 최후 항전을 벌였던 역사적 현장으로 전하고 있다. 복신(福信) 등의 백제부흥군이 최후까지 충혈을 뿌린 곳이기에 삼국 통일 후 문무왕이 이곳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당시 널리 대중의 신망을 얻고 있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이곳에 보냈다고도 한다. 특히 원효대사는 우금바위 아래 우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지어 이를 원효방(元曉房)이라 칭했다. 

​고려 충숙왕(1313년)때에는 원감국사가 순천 송광사에서 이곳의 원효방에 들어와 절을 중창하면서 황금전, 청련각, 청허루 등 30여 동을 지어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폐허가 됐으며 조선 태종 1414년 주지 선탄스님에 의해 중수됐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시 폐허가 됐다. 인조 15년 1536년 계호대사가 대법당을 중건한 후 주변 암자를 이어 대가람을 이뤘다. 그러나 이때 중창된 전각 중 현존하는 것은 대웅보전 뿐이다.

대웅보전은 백제무왕 35년(634)에 묘련(妙蓮)스님이 처음 지은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4년(1636)에 계호(戒浩)스님이 다시 지었다.  석가모니를 주불로 하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신 개암사의 본전이다. 대웅보전의 좌우 처마쪽에는 청룡과 백호가 조각되어 있다.

개암사 일주문은 1994년에 세워진 것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거북을 받침돌로 사용하고 있다. 일주문 상부 앞, 뒤에 12지 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양 옆으로는 용이 세겨져 있다. 일주문 양기둥의 채색이 서로 다르며 기둥에 세겨진 용의 모습과 색도 서로 다르다. 그 연유는 잘 모르겠으나 통상적으로 보이는 일주문과는 많이 달랐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불이교가 나오고 그 앞으로 사천왕문이 보인다.

불이교와 사천왕문 사이에는 이미 오래 전에 만개했던 꽃무릇과 함께 차 밭이 잘 조성되어 있다.


개암사의 목조 사천왕상. 눈 부위만 채색이 된 점이 다른 사천왕상과 달랐다.

지장전 내에 모셔져 있는 석조지장보살상(石造地藏菩薩坐像).  이 불상은 고려시대의 석조지장보살좌상으로 원래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서운마을의 청림사지에 전해오던 것을 개암사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연꽃을 새긴 받침들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손안에는 보주를 감싸고 있다. 자연석을 받침대로 하고 그 위에 아래로 향한 연꽃잎을 조각한 8각형의 대좌를 올려 놓았다. ​

석가모니 부처님과 16나한상.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불교의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열 여섯분을 조각한 이 불상은 조선 숙종 3년(1677)에 조성한 것으로,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대웅전 우측 길을 따라 8백여 미터, 20분 정도 올라가니, 우금바위의 밑동에 닿는다. 우금바위에는 3개의 동굴이 있다. 복신굴, 베틀굴, 원효방이 그것이다. 복신굴과 베틀굴은 개암사에서 보았을 때 왼편 바위 봉우리 아래에 있고, 원효방은 오른편 바위 봉우리에 있다. 능가산 정상 조금 못 미처 우금산성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몇 걸음 내딛으면 바위 봉우리 아래에 비를 피할 수 있는 널따란 공터와 수십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굴실이 나온다. 바로 삼국통일기에 백제부흥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한 곳이라 알려진 복신굴이다.


복신굴 앞에서 우연히 만나 부안군청 직원분의 설명에 따르면 원효방은 우금산성 안내표지판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 바위모퉁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이 길은 협소하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아래쪽으로는 경사가 심해진다고 한다. 직원분의 만류에 원효방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월정약수터로 가서 개암사로 회귀하는 길을 산책하였다. 평탄한 산책길로 우금암에서 15분 쯤 가면 중간에 개암사와 우금바위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곳이 나온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월정약수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계속 가면 만석동이 나오고 좌측으로 가면 개암사이다. 참고로 월정약수터는 2018년 9월 현재 수질이 음용 불가 상태였다.


개암사는 죽염이 유명하다. 송진으로 1,300도에서 아홉 번 구운 개암죽염은 예부터 절에서 비방으로 내려왔고 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님들에게 전수되기 마땅치 않자 정다운 스님의 동생이 비법을 이어받아 민간에 죽염회사를 차렸고,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개암죽염은 청정해역인 국립공원 변산반도의 곰소염전에서 생산된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을 3년 이상 자란 대나무 통 속에 넣고 황토 경단으로 마개를 한 뒤 소나무 장작만을 연료로 사용하여 고온으로 구워 내기를 8번 반복하고, 마지막 9번째는 소나무에 송진을 뿌려 가열 온도를 더욱 올리게 되면 소금이 녹아 흘러내리게 되는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쳐 이른바 "자색보물소금"이 탄생하게 된다. (출처 : 개암사 홈페이지)


개암사를 들어셔면 오른편에 개암죽염전래관이 있고 이곳에서 개암 죽염을 살 수가 있다. '보리'라는 녀석이 그 앞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