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전북

변산국립공원을 찾아서 ... 2) 관음기도도량 내소사

산풀내음 2018. 10. 3. 16:08


변산반도에서의 둘째날, 백제시대 사찰로 서해지역의 대표적인 관음기도 도량인 내소사를 방문하였다.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혜구두타 스님이 창건했다. 내소사가 가장 번성했을 때에는 큰 절은 대소래사, 작은 절은 소소래사가 있었다. 그 후로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의 내소사는 소소래사가 전해져온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된 절은 인조 11년(1633년)에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중건하였고 광무 6년(1902년)에 관해선사와 만허선사가 증축하였다.

내소사(來蘇寺)란 ‘오는 사람을 소생시켜 주는 사찰’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 내자개소(來者皆蘇)' 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내소사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전나무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전나무 향내음에 속세의 찌든 때가 씻어내려가는 듯하다. 내소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수령이 약 오백 여년이 되는 느티나무(할아버지 당산) 와 약 천여년 쯤 되는 느티나무(할머니 당산)가 있다. 그리고 봉래루 앞 마당에는 수령 300여 년으로 추정되는 거목 "보리수"도 자리하고 있다. ​

전나무숲길


관음조가 단청을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대웅보전(보물 제 291호)은 현재 부분적으로 서까래가 내려 앉아 보수작업이 한창이었다. 대웅보전에는 그 건립과 관련된 전설 이외에도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것이 여럿있다. 그 첫째가 대웅보전의 꽃 문살일 것이다. 조선시대 때 건립된 대웅보전의 전면에 꽃살무늬를 조각한 문짝을 달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교한 공예품들이며, 단청이 없어 더욱 자연스러운 고찰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법당 안에 있는 후불벽화에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현존 후불벽화로서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백의관음보살좌상의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고 걸으면 눈이 따라오고, 그 눈을 마주치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과 삼층석탑.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띄고 있으며, 쇠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깎아 끼워 맞추었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보전의 꽃문살. 대웅보전 전면의 8짝의 분합창문에는 연꽃, 국화, 모란 등이 조각되어 있다.

후불벽화 쪽도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 일반 신도의 접근이 제한되었다. 대웅보전에서 기도 접수를 받고 계시는 보살님의 배려도 근처에서 백의관음보살상을 친견할 수는 있었지만 사진 촬영은 할 수 없었다. 대신 내소사 다실에 걸려있는 백의관음보살상을 사진에 담았다.


내소사 대웅보전 오른편에는 해안(海眼) 대종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해안은 일생을 소박하고 가난한 생활로 보냈다. 복색도 특이해서 웃옷은 고름대신 매듭 단추를 달아서 입었고, 바지는 약간 짧게 해서 대님을 매지않은 채로 입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속에 깃들여있는 치열함은 역대 어느 선사에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무서웠다.


"절은 전쟁을 하는 장소야. 절이라고 하면 고요하고 한가로운 처소를 생각하기 쉽지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라는 걸 명심해야 돼. 적이 누구냐? 바로 삿된 것이지. 이 삿된 생각과 싸워서 이겨야만 되는 거야." ​

해안 대종사의 영정을 보니 속세의 딸인 일지 스님께 남기 글이 생각난다. 최근 조계종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종사님의 글귀가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여름에 몸 튼튼히 지내었느냐. 그리고 부처님 전에 절 많이 하고 공부도 부지런히 하였느냐? 나는 틈틈이 『열반경』을 읽어보는데 다시 또 한 번 거룩하옵신 부처님 전에 머리를 숙여 묵묵히 감격의 눈물이 젖어지는구나! 그처럼 일체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건지셨는지 생각사록 부처님의 은혜가 크고 깊구나!어찌하다 너나 내가 불법을 만나게 되었는지 아슬아슬하게 다행한 일이다. 일지야, 중노릇 잘하여라. 추잡한, 그리고 불쌍한 세속 사람들에게 물들지 말고 내가 처음에 너 갈 때 써주었던 입지여석(立志如石)이란 네 글자를 네 머리에 새겨라.중은 견성성불하는 것이 목적이니 견성을 해야 부처님의 은혜도 갚고 중생제도도 하게 되는 것이다. 견성을 하지 못하고 불법을 안다고 하는 것이야 장님이 월광(月光)을 안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디 내 말을 가볍게 알지 말고 큰 원(願)을 세워라.조석으로 불전에 예배드릴 때 네 원을 성취하도록 묵도하여라. 몸 튼튼히 가지고 노스님 시봉도 잘하여라.

출처 : 법보신문, "해안선사가 딸 일지에게",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8406



내소사 대웅보전 이야기


임진왜란으로 절이 불타 버려 중건에 노심초사하던 청민선사께서 하루는 그의 시자승인 선우를 불러 “법당을 지을 도편수가 지금 일주문밖에 오셨을 터이니 가서 모셔오너라” 하였다. 선우가 기쁜 마음으로 나가보니 한 꾀죄죄하게 생긴 사람 하나가 연장망태를 걸머진 채 문기둥에 기대어 자고 있거늘 다소 실망한 선우가 깨워 모셔 왔다.

도편수는 다음날부터 재목을 자르기 시작하였는데 몇 달 몇 일이 되어도 법당은 짓지 않고 목재를 깍고 다듬어 부재 만드는 일만하는 것이었다. 도편수의 하는 꼴이 미덥지가 않아 선우스님이 그 부재 하나를 몰래 감추었다.

삼년동안 목재만 깍던 도편수가 이제 법당을 짓는다며 부재를 세기 시작하여 세고 또 세고 수 십번을 세더니 크게 탄식하며 청민선사에게

"스님 저는 이 법당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청민선사가 그 연유를 물으니, "소인이 삼년동안 정성을 다하여 목재를 다듬었다고 믿었는데 이제 헤아려보니 하나가 모자랍니다. 이런 선심과 부족한 정성으로 어찌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연장을 챙겨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선우스님이 깜짝 놀라 감추었던 부재 하나를 내 놓으며 용서를 빌었더니 도편수가 웃으면서 "그것은 이미 부정탄 목재이니 내 그것을 빼고 지으리라"하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보전 우측 천장 한 칸의 빈자리가 있다.

법당을 완성하고 단청을 하기 위해 화공을 불렀다. 청민선사는 대중에게 '화공의 일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법당 안을 들여다 봐서는 아니된다'라고 엄격히 당부하였다. 화공은 한달, 두달이 지나도 밖에 나오질 않았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법당 앞에는 늘 목수가 아니면 청민선사가 지키고 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너무나도 궁금했던 선우스님은 어느 날 법당에 가서 목수에게 '청민선사가 부르신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법당 안을 들여다 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법당 안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없고 오색영롱한 작은 새가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 벽에 그림을 기르고 있는 것이었다. 선우는 문을 살며시 열고 법당 안으로 발을 디밀었다. 그 순간 천둥같은 호랑이 울음 소리가 들리드니 황금새는 날아가 버렸다.

호랑이 소리에 정신을 잃은 선우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청민선사는  법당 앞에 쓰러진 집채 만 한 호랑이 앞에서  "대호선사(大虎禪師)여! 생과 사가 둘이 아니거늘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지은 이 법당은 길이 법연을 이으리라"라고 법문을 설하고 있었다.

때는 1633년, 내소사 조실 청민선사께서는 대웅보전을 중건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셨다.

즉 대웅전을 중수한 도편수는 바로 호랑이가 도편수로 화현하여 지은 것이고, 법당 안의 그림은 관세음보살이 화공으로 몸을 바꾸었다가 다시 황금새로 변해 그린 것이다.


산신각

지장전

내소사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관음전과 청련암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길을 들어서기 조금 전에 불이문이 있다. 불이문 뒤로는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라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불이문 우측 상단에 보이는 전각이 바로 관음전이다.

내소산의 관음전은 능가산 관음봉 중턱에 위치해 있다. 내소사의 오른편을 돌아 청련암 가는 길로 약 10분 정도 오르면 관음전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500m(약 15분)를 더 올라가면 청련암이 나온다. 관음전에서는 곰소만의 서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내소사도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다.

관음전에서 바라다 본 내소사 전경


내소사에는 두 곳의 사내암자가 있다. 청련암과 지장암이 그곳이다. 내소사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지장암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지장암은 선방인 서래선림(西來禪林)과 나한전,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명칭이 지장암이어서 지장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대신 나한전이 있어서 의외였다. 

지장암은 통일신라 초기부터 있던 절로 신라 고승 진표율사가 창건하였으며 이곳에서 3년을 기도하여 지장보살의 현신수기와 간자 12매를 얻었다고 한다. 그 후 각해선사의 중건과 우암거사의 삼건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는 않고 겨우 흔적만 남은 은적암 옛터에 1941년 해안선사가 다시 복원하여 지장암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그 후 이곳에 서래선림을 개설하여 호남의 정법안장을 드날리는 선 중심도량이 되어 당시 해안 대종사의 법문을 듣고자 모인 불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지장암은 해안 대종사의 속세의 따님이신 일지 스님께서 수행하신 곳이기도 하다. 

지장암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전각들

지장암의 모습

나한전.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서래선림

지장암 가는 곳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님


청련암은 해발 350m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조망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곰소만과 서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 할 것이다. 청련암으로 오르는 길도 아르답기가 그지없다. 다소 가파른 길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서인지 오르는 길은 열대우림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한다. 새소리를 들어며 한걸음 한걸음 오르다 보면 속세의 찌든 피로가 다 풀리는 듯하다. 


​청련암은 백제 성왕 31년 (553)에 초의 선사가 창건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 우암혜산선사가 해체 복원중수하였다. 한때 이 절은 송진우, 김성수, 여운영등 독립지사가 일제의 피검을 피하기 위해 은거지로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청련암은 내소사 경내 오른쪽에 나 있는 길을 통해 다다를 수 있다. 내소사 뒷문에서 도보로 25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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