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전북

삼장 지장보살(三藏 地藏菩薩)을 모시고 있는 곳, 선운사

산풀내음 2019. 6. 3. 21:31


도솔산(兜率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선운산(禪雲山)은 11월 가을 애기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것 이외에도 4월에는 ‘춘백(春栢)’으로 불리는 봄 동백(冬栢)으로 그리고 9월에는 빨간 상사화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4월 동백은 선운산 기슭에 자리잡은 선운사의 대웅전 뒤에 있는 수령 약 500년 이상의 동백나무 3000그루의 군락(천연기념물 제 184호)이 최고인데 이런 아름다움을 미당 서정주 선생은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서 ‘“禪雲寺 고랑으로/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라고 하면서 선운사 동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장기도처인 선운사는 꼭 방문하고자 하는 사찰 중에 하나였다. 지난 해, 9월 상사화는 전남 영광의 불갑사에서 그리고 11월 애기단풍은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였기에 선운사에서는 기도에 더하여 4월 춘백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고자 하였지만, 인연이 부족해서인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에서야 선운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연천 원심원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장기도처인 선운사의 창건과 관련하여서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신라의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듯하다.

다른 하나는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많은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한때는 89 암자에 3,000여 승려가 수도하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본사와 도솔암, 참당암, 동운암, 석상암 만이 남아 있다.

(출처 : 선운사 홈페이지)

이후 선운사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쓰러지고 다시 세우는 중창을 반복하면서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성종 때 행호(幸浩)스님이 중창하였다가 정유재란 때 전각 대부분이 다시 불탔고, 이를 중창한 것이 이르렀다고 한다.

지장신앙의 본존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석가모니 열반 후부터 미륵불께서 나오시기까지 육도윤회의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원을 세우신 보살로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나 또한 성불하지 않으리라.”라는 서원과 함께 지옥을 완전히 없애고자 하는 분이시다. 지장보살이 관장하시는 지하세계, 즉 명부세계(冥府世界)를 현세에 옮겨 놓은 명부전을 보면,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양 협시로 하고, 시왕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이러한 지장신앙이 후세에 와서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과 결합되는데, 선운사는 바로 이러한 삼장 지장보살(三藏 地藏菩薩)을 모시고 있는 곳이며, 탱화의 형태가 아닌 불상의 형태로 온전하게 봉안되어 내려온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도솔암, 참당암, 선운사 지장보궁의 지장보살상이 각각 천장(天藏), 인장(人藏), 지지(持地) 지장보살님들이시다.





선운사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스님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강당인 만세루가 나오고 만세루 맞은 편에 선운사의 중신 전각인 대웅보전이 있다. 대웅보전의 양 옆에는 영산전, 관음전, 지장보궁이 있으며 뒷편에는 팔상전, 산산각, 조사전이 있다.




대웅보전(보물 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조선 성종 3년(1472년)에 중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광해군 5년(1613년) 다시 지은 것이다. 대웅보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숙종 14년(1688년)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대웅보전 후불벽화인 관세음보살도


육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29호).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방형의 축대 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







대웅보전 바로 옆에 위치한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


사실 지장신앙의 상징으로 대표되어지는 곳은 관음전 옆에 위치한 지장보궁으로 이 곳에는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고려 말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이 모셔져 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이곳 고창 선암사도 예외 없이 국보급 보물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그 중 선운사 관음전에 봉안되어있던 고려 말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이 1936년 어느 여름날 없어졌다.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지장보살좌상을 훔친 뒤에 이를 거금으로 매매한 후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으로 넘어간 지장보살좌상은 어느 일본인이 구입하여 소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일본인의 꿈에 지장보살이 수시로 나타나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계속 꿈에 나타나고, 급기야 병이 들면서, 집안은 더욱 기울게 되었다. 이 일본인 소장자는 마음이 꺼림칙해 이 지장보살상을 다른 일본인에게 팔아 넘겼다. 그러나 또 다른 소장자의 꿈에 지장보살은 똑같이 나타났으며 역시 병이 나고 가세도 기울었다.

이렇게 몇 차례 소장자가 바뀌게 되고, 이 지장보살좌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마지막으로 소장한 이가 고창경찰서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지장보살좌상을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과 글에 그대로 남아있다. 원래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2014년 지장보궁전(地藏寶宮殿)이 완성되면서 그곳으로 옮겨 모시고 있다. 이 지장보살좌상이 바로 선운사 삼장 지장보살 중 지장(持地) 지장보살이다. 


당시의 사진과 옆서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길로 유명하다. 산의 계곡을 따라 오르면 진흥굴과 참당암을 거쳐 도솔암에 이른다. 그리고 소리재와 연천마을를 지나 좌치나루터에 이르는 이 길을 보은길 또는 소금길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백제 위덕왕 24년(578)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하던 당시, 검단선사는 선운산 주변에 들끓던 산적과 해적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도적질을 그만두게 했다. 양민이 된 그들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검단선사에게 보은염(報恩鹽)을 보냈는데 그때 소금을 운반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라는 이야기다.​

선운사에서 도솔암 쪽으로 한참을 걷다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도솔암 가는 길이며, 오른쪽이 참당암이다. 여기에서 하나 유의할 것이 있다. 선운사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곧 두갈래의 길을 만난다. 하나는 전형적인 트레킹 길이고 다른 하나는 차량이 이동할 수 있는 잘 닦여진 길이다. 이 중에 전자인 산 길을 따라 올라가면 참당암으로 가는 갈래길을 놓치기 싶다. 참당암으로 가는 길로 빠져 나올 수 있는 개울 다리가 있지만 별도의 이정표가 없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다. 도솔암에 가기 전에 참당암을 들리고자 한다면 큰 길로 이동할 것을 권하고 싶다.

나도 이 길을 놓쳐 도솔암을 먼저 들렸다. 이후 천마봉과 낙조대를 거쳐 소리재에서 참당암으로 갔다. 



도솔암의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도솔암에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이 있고, 극락보전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나한전이 나오는데 산신각의 오른 편은 내원궁(금동지장보살좌상을 봉안)으로 올라가는 곳이고 왼 편에는 선운사의 또 다른 상징인 미륵마애불(보물 제1200호)​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도솔암이라고 하면 세계에서 유일한 미륵기도처와 지장보살기도처가 함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도솔암 극락보전

도솔암의 또 다른 전각인 수광전에도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극락보전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 옆에 위치한 윤장대


도솔암 미륵마애불은 선운사의 삼장 지장보살상보다 훨씬 오랜 전에 조성되었고,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누각은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하지만 표현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듯하다.




지장보살의 기도도량에 미륵마애불? 불교신문에 소개되어 있는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육도(六道)를 윤회하면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보살이라는 점에서 지장보살은 미륵불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또한 '지장보살본원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도솔천은 수미산 꼭대기로부터 12유순(由旬)을 지나 천계(天界)가 있는 곳에 있다. 그 안에는 미륵보살이 장차 부처가 되어 세상을 제도할 때를 기다리며 계시는 내원궁과 지장보살이 지옥 중생들을 구원한 뒤 장차 미륵보살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외원궁이 있다. 이처럼 도솔암은 지장보살님과 미륵부처님이 함께 계시는 지장·미륵 기도도량으로서 미륵신앙과 지장신앙이 함께하는 곳이다.

(출처 : 불교신문, "[53기도도량순례] - 제30차 고창 도솔암 순례 (대천신을 찾아서)")


미륵마애불이 유명하게 된 것은 불상의 가슴 아래에 있는 복장감실에 있는 비기(秘記) 때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검단선사의 신비한 비기를 미륵마애불의 배꼽 부근의 복장감실에 숨겨 두었는데, 이 비기가 열리는 날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개벽이 올 것이란 것이다. 1820년 전라감사 이서구가 소문을 듣고 마애불을 찾아와 돌출부의 뚜껑을 열었더니 그 안 문서에는 '이서구가 열어 보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갑자기 뇌성벽력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깜짝 놀란 이서구는 두려움에 책을 도로 넣고 봉했다고 한다.

그리고 1893년 가을 동학도 손화중이 미륵불 배꼽에 숨겨있는 비기를 꺼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소문이 나면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1894년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천인암(千仞岩)이라는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도솔암 내원궁에는 천장(天藏) 지장보살인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이 모셔져있다.




지장보살상의 지물은 석장과 보주가 일반적이지만 도솔암 지장보살상의 경우는 손에 법륜(法輪)를 쥐고 있다.

천장 지장보살 역시 많은 영험을 보이고 있는데, 1996년 대구에 사는 한 여성신도가 경험한 영험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유방암에 걸려 있었던 이 신도는 온갖 약과 명의를 찾아 치료에 정성을 다했으나 암은 말기까지 진행되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가족들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하였고, 신도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도솔암을 찾아 백일기도를 시작하였다. 병이 깊어진 때라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지만 정성을 다해 절을 하면서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기도에만 열중하였다.

23일째 되던 날 밤에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려라. 저승사자가 기다리는데 어찌 잠만 자고 있느냐?”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지장보살이 성큼 내려와 가슴 뒤쪽의 등을 어루만지며 큰 대바늘로 세 번을 찔렀다.

마지막 침을 빼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는데, 혼미한 가운데서도 가슴 주위가 시원해지며 오르내리기에 힘들기만 하던 요사채로 단숨에 뛰어 내려갈 수 있었다.

같은 시각에 새벽 도량석을 하던 스님이 내원궁에서 환한 빛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불이 났다며 여러 대중과 함께 달려가 보니, 그 빛은 화염이 아닌 지장보살이 내뿜는 방광(放光)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랍고 벅차오르는 환희심에 그 자리에서 엎드려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백일기도를 시작한 그 신도는 씻은 듯이 병이 나았고, 이후 도반들과 함께 ‘도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내원궁 지장보살님에게 참배를 올리고 있다. 도솔회는 도솔암에서 기도를 하여 영험을 본 이들의 모임으로서, 전국 각지에 회원이 있어 도솔암 지장보살의 영험을 가히 알 수 있게 한다.

(출처 : 불교설화, "선운사 지장보살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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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49년(627년)에서 진덕여왕 3년(649년) 사이에 의운조사(義雲祖師)가 창건한 참당암(懺堂庵)은 선운사의 암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거찰(巨刹)이었다. 창건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의운 스님이 도솔산에 살고 있을 때 산 아래 죽포 포구에 돌배 한 척이 들어왔다. 이 배는 속인들이 보려고 다가가면 저절로 멀어지곤 하다가, 스님이 제자와 함께 포구로 가니 돌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에 올라보니 옥축대장경과 석가모니불, 가섭, 아난, 16나한상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그날 밤 의운 스님의 꿈에 한 금인(金人)이 나타나 여러 불상과 경전과 보인(寶印)을 스님에게 전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진국의 왕인데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여러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던 중, 도솔사에 대참(大懺)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이 곳으로 왔으니, 청컨대 집을 짓고 편안히 모시도록 하시오.”


의운 스님은 우진국 왕의 뜻을 깊이 새겨 581년 선운산 가운데 터를 잡고 ‘대참사(大懺寺)’라 하였다.

참당암은 1981년 25세의 젊은 노회찬이 ‘나눔으로 하나 되는 세상’이란 인생의 방향을 정한 곳이기도 하다. 1980년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봄을 지켜보면서 삶에 대한 회의를 고뇌에 찬 성찰을 통해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난 곳인 것이다. 큰 뜻, 다 이루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의 순고한 희생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디 극락왕생 하소서. 

(참고) 불광미디어, 노회찬. "[내 마음의 법구] 참당암의 여름에 내린 결심"(2010.1.29.)

http://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071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곳이란 의미의 참당암(懺堂庵)​의 전각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응진전, 명부전, 참당선원 등이 있다. 응진전과 명부전은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전각에 함께 있으며 이 전각 뒤에 지장전이 있는데 이곳에 모셔진 석조지장보살좌상(전북유형문화제 제 33호)이 바로 선운사 삼장 지장보살 중 인장(人藏) 지장보살이다.


참당암 명부전과 응진전. 총 6칸의 건물이지만 각 3칸씩 응진전과 명부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좌측 3칸 응진전은 기둥 간격이 우측 3칸 명부전 보다 기둥 간격이 좁다.

참당암 지장전. 명부전 뒷편의 지장전은 한때 약사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조지장보살이 문둥병을 낫게 해준다는 소문이 나 약사보살로 불린 듯 하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