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전북

내장산 내장사와 벽련암을 찾아서.

산풀내음 2019. 11. 10. 22:18


우리나라 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내장산 국립공원에는 크게 3개의 산, 즉 내장산(763m), 백암산(741m), 입암산(654m)으로 이루어졌으며 대표적인 사찰로는 내장산의 내장사와 백양산의 백양사라 할 것이다. 작년에는 아기단풍을 보기 위해 백양사를 찾았고 올해는 내장사를 찾았다. 이미 예상한 것이지만 아직 단풍의 절정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던 것이 다소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푸름과 붉음의 아름다운 조화에서 느낄 수 있는 또다른 매력이 있으니 ... 이 또한 또다른 즐거움일 것이다.

이번 순례는 내장사 일주문에서 벽련암, 서래봉, 불출봉을 거쳐 원적암, 내장사로 내려와 일주문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를 택했다. 소개하는 자료들에 따르면 탐방객이 가장 선호하는 코스로 보통 4시간 정도면 된다고 하는데, 나는 기도시간을 포함해서 6시간이 걸렸다. 산행이 아니라 가볍게 즐기고자 한다면 일주문 - 백련암 - 원정암 - 내장사 - 일주문의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탐방로는 대부분 자갈과 흙으로 되어 있고 길 또한 완만하여 1시간 30분(4km) 정도면 충분한 듯하다.


특히 서래봉에서 서래삼거리까지의 코스가 가장 힘들었다. 나는 서래봉에서 내려가는 코스라 다행스럽게도 큰 힘이 들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이동한다면 상당히 힘든 코스였을 것이다. 거리는 400m이지만 전 구간이 철제 계단 구간으로 최소 경사도가 45도이고 거의 70도 이상이 되는 구간도 종종 있다. 이 구간을 계획하는 분들은 반드시 장갑을 준비하실 것을 권하고 싶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주차장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면, 내장산 방문객들은 3가지 유형의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무료주차장, 국가에서 운영하지만 가까이 있는 유료주차장 그리고 사설주차장이다. 1,2,3주차장은 유료주차장으로 하루 이용료가 5천원이었고, 4주차장은 무료이다. 내장산 입구까지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무료셔틀을 이용할 수가 있다.


사설주차장도 2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냥 일반 주차장으로 1주차장보다 조금더 내장사쪽에 가까운 곳에 있고 이용료는 7천원 정도인 듯했다. 다른 하나는 식당에서 운영하는 주차장으로 식사를 하는 조건으로 주차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내장산 탐방안내소에 다다르기 전에 우화정(羽化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호수 한가운데 위치한 우화정은 정자에 날개가 돋아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정자의 이름도 이 전설에 연유하여 우화정이라 했다. ​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년)에 영은조사가 지금의 절 입구 부도전 일대로 추정되는 자리에 세운 사찰로 당시의 사찰명은 영은사(靈隱寺)였다. 그러나 조선 중종 34년(1539년)에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장사와 영은사는 독립된 2개의 사찰이었다.


승도탁란사건이란?


<중종실록>에는 ‘중종 34년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탁란(濁亂)은 ‘세상을 흐리고 어지럽히다.’는 의미로 ‘스님들의 집단적으로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종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물이다. 중종은 조선의 왕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배불 정책(排佛政策)을 폈던 인물이다.  자신의 위협 세력인 훈구 세력들을 통제하고 대항마로서 사림을 정치경제적으로 성장시켜야 했다. 거기다 막강한 경제력과 유사시에 군사적 위협으로 등장할 수 있는 불교를 다스려야 하는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중종은 즉위하자마자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승과를 완전히 폐지하고 선교 양종까지 없애버렸다. 각도의 사찰을 폐사로 만든 뒤 토지를 향교에 속하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경국대전>에서 승려의 출가 규정을 담은 도승조(度僧條)를 지워버리게 함으로써 승려가 될 수 있는 모든 법적 근거까지 없애 버렸다.

더 나아가 중종은 그해 2월에 호남 지역 3,000여 명의 스님들을 환속시켜 군적에 올리도록 했다. 결국 스님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하였고 중종은 이들과 근거지가 된 내장사를 ‘도적의 무리이며 도적의 소굴’이라 하여 아예 불을 질러 버렸다. 


(출처 : 채널코리아뉴스, "중종은 왜 내장사에 불을 질렀을까?")

명종 12년(1557년)에 희묵(希默)은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산 아래에 무궁무진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로 절이름을 내장사(內藏寺)로 고쳤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내장산 암자로 이송된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내장사 주지이자 승병장이셨던 희묵대사와 승병들의 노력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장사는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 인조 17년(1639년)에 영관(靈觀)이 법당 등을 중수하고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정조 3년(1779년)에는 영운(映雲)이 대웅전과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하였다. 1923년에는 학명(鶴鳴)이 절을 벽련암(碧蓮庵)의 위치로 옮겨 짓고 벽련사라 하였으며,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1938년에는 매곡(梅谷)선사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면서 사찰명도 지금의 내장사(內藏寺) 로 바꾸었다. 1951년 1월 12일에 불탄 뒤 중건을 보지 못하다가 1957년에 요사인 해운당을 건립하였고, 1958년에는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일주문, 천왕문, 정혜루를 지나면 삼층석탑이 나오고 삼층석탑 뒤로 내장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관음전과 극락전이, 우측에는 삼성각, 명부전 그리고 오층석탑이 있다.




대웅보전. 1958년 타 지역에서 내장사로 옮겨 세운 대웅전은 2012년 10월 누전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건물은 물론 불상과 불화 등이 모두 불에 탔다. 2014년 7월 착공하여 2015년에 8월에 복원되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관음전


관음전 관세음보살상 옆에는 조선 동종이 보관되어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림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극락전

아미타부처님

명부전, 명부전 뒤로 삼성각과 오층석탑이 보인다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님

삼성각과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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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샘 설화

내장사를 중심으로 한 내장산에는 희묵대사와 장군샘에 관한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희묵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내장사 주지로 계시면서 승병을 이끌면서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어진을 지킨 분이시다.

조선 제13대 명종 때의 일이다. 내장산 영은사에 희묵스님이라는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힘이 세기로 천하장사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곤 했다. 산에서 나무를 하던 어느 날, 스님은 시커먼 천연동굴에서 호랑이를 맞닥뜨렸다. 집채만한 호랑이는 제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 침입자가 나타나자 모성애의 본능을 발휘하여 달려들었다. 그때 벼락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고 그 소리에 호랑이도 주춤했다.

그 다음 순간적으로 희묵스님은 호랑이를 향해 달려들였다. 한 손으로는 호랑이 목을 죄며 다른 한 손으로는 들고 있고 낫등으로 일격을 가했다. 그는 호랑이를 죽일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낫등으로 호랑이를 내리쳤고 호랑이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희묵스님은 쓰러져 있는 호랑이를 주물러 회생시킨 뒤 호령하였다. “어서 네 새끼들을 돌볼아라.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한테는 덤벼들지 말아라. 알겠느냐?” 호랑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 동굴 저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소문이 퍼져 나가자 동네 사람들은 물론 전국 각지어서 승속을 초월하여 희묵스님을 만나 보고자 모여들어 내장산 일대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 그 당시 힘이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스님이 또 한사람 있었다. 희묵스님의 일화를 소문으로 들어서 알게 된 그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희묵스님이 50대인데 비해 자신은 2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더욱 자신만만했다.

그의 이름은 희천이었다. 희천스님이 내장산 영은사로 희묵스님을 찾아왔다. ​​희천이 바라보니 희묵스님은 키도 그리 크지 않았고 몸집도 작았다. 하지만 그가 천하장사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이상 쉽사리 보아 넘길 수도 없었다. 희천스님은 젊은 패기로 희묵스님을 이겨 보고 싶었다. 하지만 희천은 도저히 희묵스님을 당할 재간이 없음을 알고 진실로 마음을 굽혀 그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희천스님은 희묵스님이 어떻게 힘을 기르는지 알고 싶었고, 또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희묵스님은 특별히 운동을 한다거나 체력 단련을 하지도 않았다. 희천은 희묵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희묵스님은 새벽 예불을 끝내고 나서 어김없이 등산을 했다. 특별히 장비를 갖추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차림새로 등산을 했다. 희천은 희묵스님의 뒤를 밟았다. 영은사 뒷산을 오르는 스님은 나는 듯이 빨랐다.

이윽고 한참을 오른 희묵스님은 산 중턱에서 물을 한 움큼 마시고는 곧바로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 다음날도 희묵스님의 행동은 마치 정해진 길을 오가는 시계추마냥 일정했다.

‘그렇다면 저 샘물에 혹시 힘을 길러 주는 어떤 특유의 성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희천스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희묵스님의 뒤를 이어 그 샘물을 움켜 마셨다. 그렇게 한 파수가 흘러갔고 다시 한 파수가 끝나 갈 무렵, 희천은 생각지도 않았던 어떠한 힘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물맛이 좋았다. 희천도 전국의 약수터에서 좋다는 물은 다 맞보았지만 내장산 영은사 뒷편의 샘물만큼 맛좋은 약수는 아직까지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희묵스님은 아무래도 희천의 거동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희묵스님의 뒤를 밟던 희천은 이미 알아낼 것을 알아낸 뒤라 방심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오히려 희묵스님의 미행을 당했다. 희묵스님은 희천이 자기만 알고 있는 샘물을 마시고 있음을 알아냈다. 희천이 막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난데없이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스승 희묵스님의 음성이었다.

“네, 이놈, 어찌하여 스승의 허락도 없이 맘대로 샘물을 마시고 있느냐?”

물을 마시는 것이 무슨 죄일까마는 갑작스레 당한 일에다가 스승만이 알고 있는 샘물을 폭로시켰다는 생각에 희천은 송구스런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했다. 희묵스님은 제자를 시험하기 위해 산봉우리로 올라가 크고작은 돌들을 산 아래로 던졌다. 희천스님 역시 원래 힘이 센데다가 젊은 혈기로 스승이 굴리는 돌들을 모두 받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지금도 내장사에 가면 그때 희천스님의 받아 쌓았다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하여튼 두 스님은 모두 힘이 세기로 유명했으며 그 힘은 바로 내장사(당시의 영은사) 뒷산에 있는 샘물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그 샘물을 장군샘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희묵스님와 희천스님은 승병을 진두지휘하여 왜병에 맞서 싸웠으며 승병들은 두 스님을 장군으로 호칭하였다. 그래서 그 산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며 그 샘을 장군샘이라고도 했다.

<출처 :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내장사 산내 암자인 벽련암은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환해선사가 창건하였다. 하지만 1539년 조선 중종 34년 승도탁난 사건에 의해 내장사와 함께 조정의 폐찰령에 의해 소실되었다. 1925년 백학명선사가 전각을 중창하였으나 한국동란(1951년1월28일)때 소실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1986년에 세워진 것들이다.


벽련선원이란 현판을 보고 암자로 들어서면 생각보다 큰 규모와 정갈한 모습에 한번 놀라게 된다.

천불전



내장사의 또다른 산내암자인 원적암은 고려 선종3년(1086) 적암대사가 7개여동으로 창건하였는데 정유재란과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전부 소실되었고 1961년 법명스님이 지금의 암자로 개축했다.


원적암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적암 관세음보살입상


내장사는 단풍만 유명한게 아니라 이곳 원적암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천혜의 비자나무 숲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비자나무? 다소 생소한 이름이라 검색을 해보았다. 천연기념물 153호인 비자나무는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과 함께 피톤치드를 많이 배출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삼림욕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고자 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이 피톤치드이고,   피톤치드에는 테르펜이라는 향균물질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 물질이 체내에 흡입되면 심폐기능이 강화되고 항균, 이뇨, 거담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비자나무는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 숲이 유명한데, 이곳 내장산국립공원에서는 원적암 일대 뿐 만 아니리 백양산 백양사 일대도 많이 분포하고 있다. 비자나무의 열매인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였고 음식이나 제사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지방분이 있어 비자유를 짜기도 하는데 기관지 천식이나 장 기능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 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