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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님을 뵙기 위해 찾은 심원사

산풀내음 2018. 9. 5. 21:20

우리나라 3대 지장기도도량이라고 하면 보통 연천 심원사, 남해 용문사, 선운사 도솔암을 이야기한다. 그중에서도 심원사(또는 원심원사)는 가장 대표적인 지장기도처라 할 것이다.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 석가불이 열반한 후 미록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6도(六道)를 윤회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해 준다는 보살이 바로 지장보살이다. 

전국 제일의 지장기도도량인 심원사(深源寺)는 본래 철원에 있었던 사찰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연천군에, 부속암자 4개를 거느리고 있었던 큰 사찰이었다. 이런데에는 한국전쟁의 슬픈 역사가 있다. 심원사는 647년 (진덕여왕 1년) 영원조사가 창건하고 당시에는 '흥림사'라 하였다. 당시 영원조사는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 이름)에 4개의 사찰을 창건하였으나 영원사, 법화사, 도리사는 폐사되고 흥림사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흥림사도 1393년(태조 2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396년에 무학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심원사로 개칭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전소됐다 다시 일어섰지만 조선말 의병항쟁의 여파로 또 다시 스러졌다. 1907년 10월 수차례에 걸친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화근을 없애기 위해 불을 놓았던 것이었다. 이듬해인 1908년부터 복구되기 시작하여 다시 한번 일어선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절은 다시 불에 타 사라졌다. 1951년 6월부터다. ‘철의 삼각지’ 중 철원을 확보하기 위한 요충지가 보개산이 되면서 양측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UN군의 1주일에 걸친 융단폭격 후 국군이 주둔하면서 폐허로 변했다. 이 때 석대암ㆍ지장암ㆍ성주암ㆍ남암 등 59개에 달하는 부속암자도 모두 멸실됐다.

이렇게 한국전쟁으로 다시 절이 불에 탔고, 전쟁 후에는 당시의 절터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자 어쩔 수없이 주지 김상수스님은 1955년 4월 연천군 신서면 하내산리의 옛터에서 현 위치를 옮겨 조그마한 절을 짓고 심원사라 편액했다. 1962년에 명주전(明珠殿)을 짓고, 1970년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을 세웠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심원사의 원 터에 복원의 빛이 들어왔다. 군사보호시설로 국유화됐던 옛 심원사 땅 250만 평을 1997년 영도 스님이 5년 간의 소송 끝에 되찾았다. 이어 2003년 연천군의 협조로 복원을 위한 발굴을 하고, 2004년에는 옛터에 천불전 복원을 일궜다. 즉 철원의 심원사와 별도로 연천에 심원사를 재건하고 이를 '원심원사(元深源寺)'라 칭하였다.

심원사의 주불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명주전이다. 이곳에는 연천에 있었던 원래의 심원사의 사내암자였던 석대암에 모셔져 있었던 '생지장보살(生地臧, 살아있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생지장보살'과 관련하여서는 신비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연천 명주전에 모셔져 있는 생지장보살

좌측으로부터 주불전인 명주전,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 그리고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심원사 입구에서 본 심원사 전경


보개산 석대암 뒤에는 큰 봉우리가 있는데 사람들을 ‘환희봉’ 또는 ‘대소라치’라고 불렀다. 대소라치는 큰 봉우리 혹은 큰 고개라는 뜻이다. 그 너머에는 옛날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 이순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냥을 잘해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날 이순석은 친구 한명과 함께 활과 창을 메고 대소라치 능선을 찾아 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해질 녘이 다 되도록 토끼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가 이순석에게 푸념석인 말투로 말을 건냈다. 

​“자네의 사냥솜씨가 뛰어난 것을 알았는지 이 산의 짐승들이 모두 도망간 모양이네. 어쩌겠나. 사냥이 잘 되는 날도 있고, 안되는 날도 있을 테지. 오늘은 해가 저물어 가니 하산준비를 하세.”

그 순간 이순석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들어왔다. 덩치로 보아서 산돼지나 호랑이 등 몸집이 큰 짐승임을 직감했다.

“쉿, 조용히 하게 이사람. 저기 큰 짐승이 어슬렁 거리며 걸어가고 있네. 색깔이 누런 것을 보니 호랑이 같기도 하고, 머리와 꼬리를 보니 산돼지 같기도 하네. 나는 잘 분간이 안되니 자네가 찬찬히 살펴보게.”

바위 밑에 납작 엎드리며 친구가 말했다.

“돼지야. 그것도 금돼지야. 값이 제법 나갈 짐승이니 놓치지 말로 잡도록 하세.”

이순석은 활시위를 어둠속에 가려진 짐승을 향해 힘차게 당겼다. “명중이야.” 손가락을 떠난 즉시 느낌이 왔다. 화살을 맞은 짐승은 피를 흘리며 대소라치 능선을 삽시간에 타고 올라 봉우리까지 단숨에 도망갔다. 두 사람은 재빨리 산봉우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금돼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을까. 분명 화살을 맞았는데….” 두 사냥꾼이 주변을 뒤지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도 찾던 금돼지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돌로 만든 지장보살님이 머리만 우물 속에서 내민 체 숨을 급하게 몰아쉬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저기 지장보살님이 우물에 빠져 있어. 그런데 왜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혀 있지? 혹시 자네가 쏜 게 아닌가?”

친구의 말에 이순석이 살펴보니 분명 자기가 쏜 화살이었다.

“아이쿠 큰일났다. 내가 지장보살님을 쏘았어.”

두 사냥꾼은 급히 지장보살님의 어깨에서 화살을 제거하고 우물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몸집이 작은 지장보살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지장보살님이시여. 저희 중생들의 우매함을 용서해 주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들은 내일 다시와서 당신을 뵈올테니 부디 우물가에 계셔 주세요. 그러면 저희들은 부처님께 귀의해 출가의 길을 걷겠나이다.”

부들부들 떨던 두 사냥꾼은 부랴부랴 산을 내려왔다. 다음날 날이 밝자, 두 사냥꾼은 다시 산에 올라가 보았다. 어제는 머리만 밖으로 나와 있던 지장보살님이 우물 옆 돌반석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크게 깨달은 두 사람은 참회하고 출가했다. 순석은 그 뒤 300명의 사냥꾼 무리를 제도하고, 이 지장보살상을 모실 절을 지었다. 그들은 언제나 숲 속의 돌(石)을 모아 대(臺)를 쌓고, 그 위에 앉아 정진했기에, 절 이름을 ‘석대암’이라 했다. 창건 이후 석대암의 지장보살은 수많은 이적을 남겼고, 영험들로 인해 ‘살아있는 지장보살’로 받들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석대암은 폐허가 됐고, 지장보살상도 실종돼 행방이 묘연해졌다. 우연히 한 불자가 서울에 은닉돼 있던 이 보살상을 되찾아 심원사에 다시 모셨다.

- 불교신문, "연천 보개산 원심원사"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