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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길에서 만난 석굴암

산풀내음 2018. 10. 5. 04:23

북한산국립공원의 도봉산 지구내에 있는 다섯개의 암봉을 오봉(五峰)이라 하며 그 중 관음봉(觀音峰) 중턱에 석굴암이라는 사찰이 있다. 석굴암(石窟庵)이란 사명(寺名)은 경내에 위치한 자연석굴에 나한(羅漢)을 봉안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동지 팥죽공양, 생쌀 공양 등 석굴에 봉안된 나한 관련 설화가 여럿 전해지면서 영험한 기도처로 이름을 얻고 있다.


오봉은 한 마을의 다섯 총각들이 원님의 예쁜 외동딸에게 장가들기 위하여 상장능선(오봉과 마주한 뒷편의 능선)의 바위를 오봉에 던져 올리기 시합을 하여 현재의 기묘한 모습의 봉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석굴암에 가기 위해서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경계짓는 우이령길을 이용해야 한다. 경기도 양주와 서울 우이동을 이어주며 소귀고개길로 알려진 우이령길은 역사적으로 병자호란때는 청나라가 공물을 뺴앗아가던 길이었고,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사대문을 드나들 수 없었던 승려들이 몰래 지나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병대가 작전도로로 개설하여 차량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1968년 김신조 간첩사건 이후 군 부대가 들어서면서 41년 동안 민간의 출입이 통제되어 오랜시간 생태계가 자연 그대로 보전되면서 '서울의 비무장지대'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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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길은 2009년에 민간에 개방되었지만 그 동안 잘 보전된 생태계를 더 잘 보전하기 위하여 탐방예약제를 통하여 탐방인원 및 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매일 1,000명 내외 예약가능(강북구 우이동에서 500명, 양주시 교현리에서 500명)

② 예약은 인터넷(www.knps.or.kr)에서 가능

③ 예약개시일 오전10시부터 사용당일 정오12시까지 예약가능하며, 1인당 10명까지 가능

④ 09:00~14:00까지만 출입가능하며 16:00까지 하산해야 함.

⑤ 예약확인증과 신분증(예약자, 동행인) 지참​

보다 상세한 내역은 아래 사이트에서 ...

https://reservation.knps.or.kr/information/trailInfo.action?trailCd=2​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는 4.5km이며, 그 중간에 석굴암으로 갈 수 있는 삼거리(교현에서 2km)가 나온다. 교현에서 우이령까지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오르막이라 보면 될 것이고, 우이에서 우이령은 교현에서의 길보다는 다소 경사도가 있다. 따라서 교현에서 우이는 1시간 15분 정도 잡으면 될 듯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10분 정도 더하면 될 듯하다. 석굴암삼거리에서 석굴암까지는 15분 정도 걸렸다.


석굴암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시대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가 문무왕 때 창건했다는 설과 고려말 도선국사 창건설, 나옹선사 창건설 등이 구전으로 전할 뿐이다. 혹은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가 3년간 수행했다고도 전한다.

가장 최근의 기록인 1927년 작성된 '봉선사 본말사지'에 따르면 조선 세종 25년(1443년)에 무학대사의 제자인 관익대사가 중수하고 석굴에 지장보살과 나한 두 존상을 봉안했다. 이후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 물려준 1455년에 정순왕후가 단종을 위해 3년간 천일기도를 하고, 1만냥을 시주해 원찰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부터 현 사찰을 중심으로 약 25만㎡(7만5천여 평)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토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출처 : 금강신문, "⑩ 경기 양주 오봉산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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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석굴암은 초안스님에 의해 복원되었다. 1954년 6월 5일 세수 28세에 초안스님이 이곳에 오셨을 때 법당은 완전 전소되었고, 석굴안에는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님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나뒹굴고 파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초안스님은 주변에 널려있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안장해 주었고, 이후 45년 간 주석하면서 축대, 요사채, 삼성각, 대웅전 건립과 3존불 조성, 범종 및 범종각 등 끊임없이 불사를 진행해 지금에 이르게 하셨다.

초안스님의 복원불사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신조 사건 이후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우이령길의 민간이 출입통제가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찰 부지 문제였다. 초안스님이 석굴암에 오셨을 때에는 사찰 소유부지가 한평도 없었다고 한다. 약 25만㎡(7만5천여 평)에 달하는 토지가 석굴암 소유였다고 전하지만, 해방 후 확인된 토지대장에는 일본인과 한국인 등 3명이 소유자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중 교회 장로였던 최 모씨가 교회에 땅을 기증하면서, 1,000년 터를 지켜온 석굴암에 부지에 교회가 들어설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피로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인근 지역 토지대장이 석굴암을  기준으로 하고 있고, 주변인들의 증언에 힘입어 사찰 부지 소유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출처 : 금강신문)

오봉산 석굴암은 함경남도 길주군 석왕사, 경북 청도 운문사 사리암, 경북 영천군 거조암, 전북 완주군 봉서사, 서울 수유동 삼성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한기도도량이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며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라 하여 일찍이 신앙대상으로 존중되었다. 실제 나한기도 도량은 지극정성으로 기도 정진하면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반면, 계율을 어기고 소홀히 하거나 몸가짐이 부정하면 엄한 과보를 받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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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비롯해 16나한, 5백나한을 주로 나한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특히 석굴암과 운문사 사리암 같이 홀로 모셔져 있는 나한은 독성(獨聖)이라고 하며, 나한을 모시고 있는 전각을  영산전, 나한전, 응진전이라고 한다.

오봉산 석굴암의 독성님이 보이신 영험과 이적(異蹟)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 중 대표적인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더 많은 이야기는 오봉산 석굴암 홈페이지(http://www.sukgulam.com) 참조

독성님과 동지팥죽


1792년 당시에는 석굴암에 노스님과 동자승 단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그 날은 마침 동짓날이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와서 마을과의 왕래가 두절되었다. 동자승이 아침 일찍 일어나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를 헤집어 보니 그만 불씨가 꺼져 있었다. 노스님께 꾸중들을 일에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동자승이 공양간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간. 석굴암에서 10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차(車)씨네 집에서도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50대 초반의 차씨 부인(파평 윤씨)이 인기척에 놀라 부엌밖으로 나가보니 발가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차씨 부인이 "어디에서 새벽같이 왔는냐?"하고 묻자 동자승은 "오봉 석굴에서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대답했다. 차씨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 "아니, 스님도 너무 하시지. 이 엄동설한에 아이를 발가벗겨 불씨를 얻으러 보내는 법이 어디 있냐"고 안타까워하며, 때마침 펄펄 끓는 팥죽 한 그릇을 떠서 동자승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통아이 같으면 펄펄 끓는 팥죽을 수저로 불며 떠 먹었을 텐데, 이 동자승은 그릇째로 들이마시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차씨 부인은 얼른 부엌에 가서 불씨를 담아 소중히 동자승에게 건넸고, 불씨를 얻은 동자승은 홀연히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부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난 영감(차대춘 씨)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차씨 영감은 혹시 동자의 흔적이라도 있을까 해서 사립문 밖에 나가 보았지만 눈 위에는 발자국 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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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눈이 어느정도 녹아 노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가니 차씨부부가 일주일 전 동짓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노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스님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동짓날 사시에 마지를 드리려고 예블을 드릴때 나한존상의 입가에는 팥죽이 묻어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났던것이 새롭게 떠 올났던 것이었다.

그래서 동자승을 불러 확인해 보니, 동자승이 불씨를 꺼뜨리고 항망중에 나반존자께 기도를 드렸는데, 불씨가 저절로 되살아나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것이었다. 바로 동자승의 안타까운 사정을 굽어살핀 독성님이 이적(異蹟)을 보이셨던 것이다.

차씨 집안은 특히 이날 독성님께 팥죽을 공양한 음덕과 어머니의 간절한 나한기도 덕분에 6·25전쟁 피난길에서 잃어버렸던 당시 아홉 살 차영민 씨(차대춘 씨의 6대손)가 살아서 돌아오는 등 집안이 나날이 번창해 화목한 일가를 이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