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경기

동방 제일의 풍광, 운길산 수종사

산풀내음 2018. 10. 23. 20:04



남양주 운길산에는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이 ‘동방 사찰 중 제일의 풍광’이라 칭송한 사찰이 있으니, 바로 수종사이다. 그리고 그는 그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시 한수를 지었으니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상방(上方, 절)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 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꺼나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이야기 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아라

​​

그로부터 340여 년 뒤인 다산 정약용도 '춘일유수종사'(春日遊水鐘寺 봄날 수종사를 유람하다)라는 시로 수종사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있다.

麗景明衣袖 (여경명의수), ​고운 햇살 옷깃에 비추어 밝은데

輕陰汎遠田 (경음범원전), 옅은 그림자 먼 밭에 떠 있다

舍舟欣散漫 (사주흔산만),​​ 배에서 내리니 자유로워 기분 좋고

入谷愛幽娟 (입곡애유연), 골짜기에 들어서니 그윽하여 즐겁구나

巖卉施妝巧 (암훼시장교),​ 바위 풀 교묘하게 단장하였고

山茸發怒專 (산용발노전). ​ 산 버섯 둥글게 불끈 솟아나왔네

漁村生逈渚 (어촌생형저),​ 아스라한 강변에 어촌이 보이고

僧院寄危巓 (승원기위전),​ 위태로운 산머리엔 절간이 붙어있다

慮澹須輕物 (려담수경물),​ 생각이 맑아지니 사물이 경쾌하게 여겨지고

身高未遠仙 (신고미원선),​ 몸이 높아지니 신선이 멀지 않구나

惜無同志客 (석무동지객),​ 안타까움은 뜻 맞은 길손이 없어

談討溯微玄 (담토소미현), 현묘한 도 찾는 토론 못함이로다


이렇듯 수종사는 신비로운 경치를 관망할 수 있는 사찰로 유명한데, 이 신비로운 풍경은 바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다. 특히 운무가 가득할 때의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의 풍경은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고 한다.

수종사의 창건과 관련하여서는 신라시대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수종(水鐘)사, 즉 '물종'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이 산 위에서 솟아나는 이상한 구름 기운을 보고 가보았더니 우물 속에 동종이 있어서 그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며, 또한 조선시대 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 오대산 기도를 마치고 북한강 뱃길로 한양으로 향하다가 이 곳 이수두(두물머리, 곧 양수리)에서 묵던 밤, 멀리서 울리는 맑고 은은한 종소리를 듣고, 이튿날 종소리가 들린 운길산을 뒤졌으나 절은 안보이고 작은 암굴에 모셔진 18나한을 발견한다. 이에 세조가 18 나한을 봉안해 절을 중창하고 수종사라 하였다고 한다.

임금님의 행렬이 도착한 것은 해거름 때였다. 오대산을 다녀 오는 임금(세조)의 행차가 한양 대궐까지의 백리길을 앞두고 하루 저녁 묵어갈 행궁을 마련한 곳은 양수리.

풀벌레 애잔한 울음소리를 따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침상에 들었던 임금이 벌떡 일어나야 했다. 귀에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좋은 종소리로다. 이 근처에 큰 절이 있음이야. 그런데 어찌하여 대신들은 절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꼬 …"

임금은 종소리가 강 건너 산 중허리에서 들려오고 있음을 알았고 그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감상하며 잠이 들었다.

"이 근처에 큰 절이 있는 듯 한데 어떤 절이 있더냐?"

이른 아침 임금이 기침하여 물었으되 대답하는 신하는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모른다면 어제 밤에 들린 종소리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

신하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바라 보았다.

"전하, 이곳 인근에 종소리가 들릴만한 절은 없삽고 지난 밤에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나이다."

"내가 헛것을 들었을까. 그럴리가 없다. 이는 분명 부처님이 어떤 계시를 내리심이로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다다른 임금은 바로 신하들에게 강 건너 산을 조사 하도록 했다.

"분명 절이 있거나 절터라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종이나 파편이 있으면 반드시 보고하라. 어떤 기이한 형상이 있으면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하라."는 단서와 함께.

한 나절만에 돌아 온 군사들과 대신들은 이미 강을 건너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왕에게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그 산은 운길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산 정상 가까이에서 그리 깊지 않은 암굴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암굴앞은 절터의 흔적이 완연하나 폐허가 되어 이렇다 할 유물이 없었다. 다만 암굴에 열여덟 분의 나한님들이 가지런히 조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하들이 군사를 데리고 암굴앞에 이르니 18나한상 앞쪽의 암굴 천정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큰절에서 듣는 아름다운 범종소리와 흡사하다는 보고였다.

"바로 그곳이다. 그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음이니 분명 나한님들의 조화라 할 것이다. 내 그곳에 참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길을 잡도록 하라."

암굴에 도착한 임금은 나한님들을 보고 경탄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신묘한 조화로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그 위신력에 감복하며 경건하게 절을 올렸다. 아라한을 살적(殺賊)이라 부르는 것은 수행의 적이 되는 모든 번뇌를 물리치고 항복 받은 것을 뜻하며, 응공(應供)이라 부르는 것은 모든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위치에 올랐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진리에 상응하는 분이라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제 임금의 귀에 신묘한 종소리를 듣게 하여 한양 궁궐행을 하루 미루고 임금과 신하들을 운길산으로 오르게 한 이 18나한님들의 신통 앞에 임금과 신하들이 경배하고 있는 참이었다. 참배를 마치고 암굴 앞에 서서 산아래를 둘러본 임금은 다시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앞에 펼쳐진 정경이 가히 조선제일의 풍광이었다. 남한수와 북한수가 만나는 저 아래의 양수리는 조물주가 그려놓은 한폭의 커다란 그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절의 흔적이 있으니 지난날 절이 피폐하여 나한님들이 당(堂)을 잃고 암굴에 드신 것이 안타깝도다. 아마 짐의 귀에 들린 종소리는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나한님들의 계시가 분명하니 팔도방백들은 속히 의논하여 이곳에 절을 지으라. 그리고 절 이름은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 뜻을 새겨 수종사(水鍾寺)라 함이 좋을듯 하다. 절 이름에는 나한님의 신묘한 위신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속히 불사를 진행하도록."

임금은 이렇게 명하고 다시 암굴에 들어갔다. 빙그레 웃으시는 듯한 나한님들을 우러러 보며 자신의 죄업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청량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임금은 한나절을 암굴 앞에 서서 산세와 양수리의 풍광을 즐기다가 두그루의 은행나무를 심고 하산했다.

출처 : 법보신문, "한국사찰 설화와 전설-수종사",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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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일주문까지는 다리품을 팔아 오를 수도 있지만 차량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경사가 조금 급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전날의 강행군으로 지친 몸을 차량에 의지해 오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일주문 초입에 두개의 사리탑이 있고, 이제 갓 물들기 시작한 단풍의 아름다움과 함께 조금 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석조미륵입상이 온화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일주문 안쪽에 조각된 용

석조미륵입상


석조미륵입상에 인사를 올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불가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서는 불이문이 나오고 이를 지나 산길을 조금 더 오르면 해탈문과 함께 수종사가 나온다. 수종사에는 일반적으로 일주문, 불이문과 함께 있는 사천왕문이 없다. 다만 불이문에 사천왕이 그림으로 모셔져 있는데 이것이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듯하다.


수종사 불이문



해탈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삼정헌(三鼎軒)이다. 삼정헌은 詩. 禪, 茶가 곧 하나로 통하는 茶室이라는 뜻으로 조계종 25교구 본사의 조실스님이신 월운스님께서 지으셨다고 한다. 삼정헌에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무료로 차를 제공하고 있으며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더없는 장소로 정평이 나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다산 정약용, 다성茶聖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 등이 모여 차 맛을 즐겼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찾은 시간에는 불교대학 교리 강좌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그러한 맛고 멋을 느끼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삼정헌



수종사의 주불전은 대웅보전이다. 그런데 수종사 대웅보전을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좌우협시불을 보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 옆에는 수종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인 세종 21년(1439년)에 세워진 정의옹주(태종의 다섯번째 딸) 부도와 세조 4년(1458년) 왕명으로 중창 당시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팔각5층석탑(일명 수종사다보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 있다. 또한 세조의 명으로 중창 당시 심어진 은행나무도 수종사 한켠에 우뚝 서 있다.




정의옹주 부도와 팔각5층석탑

대웅보전 옆 요사채


세조가 심었다고 하는 수령이 500살이 넘은 은행나무




수종사 내에는 세조가 굴속에서 18나한을 꺼내어 모셨다는 응진전이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설화 속의 석굴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