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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 상주하시는 용문산 상원사

산풀내음 2018. 12. 25. 18:25



경기도 양평에 가면 '용이 드나드는 산' 혹은 '용이 머무는 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문산(龍門山, 1157m)이 있다. 본래 '미지산(彌智山)'이라 불렸던 용문산은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용문산은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와도 인연이 깊은 산이다. 고려 말 나옹선사의 법맥을 이은 무학대사는 1398년 왕사를 그만두고 용문산 용문사 또는 상원암 에 들어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1402년 왕명으로 회암사로 옮기기까지 4년 동안 용문산에 주석하였다. 이런 용문산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리고 은행나무로 유명한 용문사(龍門寺) 이외에도 윤필암(潤筆庵), 상원사(上院寺) 등의 사찰을 품고 있다.

일요일 아침 그냥 길을 나섰다. 그리고 세조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상원사로 향했다. 용문산 깊숙하게 자리잡은 상원사의 첫인상은 수행과 기도를 위한 도량이라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관광객은 찾아볼 수 없고 기도를 위해 찾은 몇몇의 신도들과 기도 정진 중이신 스님들이 전부였다. 근방이라도 관음보살께서 나에게로 내려오셔서 나의 어깨를 도닥거려 주실 듯했다.

상원사가 언제 그리고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태고보우가 상원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12대 서원을 세웠다는 내용이 유창(維昌)의  「이웅존자시원증행장(利雄尊者諡圓證行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원사은 태조 7년(1398년)에 정지 국사 지천(智泉)의 제자로 1395년에 스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를 중창한 조안(祖眼)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원사는 본래 용문사에 속한 산내 암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여러 설화 등을 통해 관음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 같다.

상원사는 태종의 둘째 아들로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태조 5)-1486년(성종 17))의 원찰(願刹, 창건주(創建主)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하는 절)로 잘알려져 있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회암사(檜巖寺), 흥천사(興天寺) 등의 중건에 기여하였고, 여러 경전의 언해·간행에 참여하였다. 조카인 문종 즉위(1452년) 당시 효령대군의 농장(農莊)이 상원사 인근에 있었다. 이곳에서 종을 주조하여 절에 봉안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다. 이처럼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상원사의 인연은 세조에게도 이어진다. 세조와 관련하여서는 평창 상원사에서의 문수보살 친견, 남양주 수종사에서의 나한의 계시 등 불보살들과의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인근의 용문사도 세조가 어머니인 소헌왕후를 기리기 위하여 꿈에 나타난 모친의 바램대로 대대적인 불사를 한 것으로 인연이 있으며, 이곳 상원사에도 세조가 이곳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이야기기 전해져 온다.

최항(崔恒, 1409~1474)이 쓴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이조 세조(世祖) 대왕7년 10월에 중궁과 세자와 같이 경기도 지평(砥平 :지금 양평) 미지산(彌智山, 지금의 용문산) 밑으로 사냥을 갔다. 대왕은 산 밑에 머물러 두고 위졸(衛卒)두엇만 데리고 상원사(上院寺)로 올라갔다. 그 절은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태조 5)-1486년(성종 17)) 원당(願堂)이었다.


그 전날은 번개와 천둥과 비와 우박이 왔지마는 이날은 구름 한점이 없고 일기가 청화하였다. 절을 2리쯤 남겨놓고 종소리, 북소리, 범패(梵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었다.


대왕은 생각하기를 「아마 호령대군이 미리 스님을 시켜서 작법(作法)하면서 기다리나보다. 」하였다. 그러나 급기야 가서 본즉 산중은 적적하여 한사람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또 범패소리가 들리었다. 그러나 어디서 나는지 알지 못하였다. 절 밖에 있는 스님들이 하는가 하였으나 그때 스님은 모두 절을 비우고 멀리 나가 아무도 감히 가까이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범천(梵天)에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산하에 머물러 있던 장상(將相)과 군민들은 모두 공중에서 경운(慶雲)이 일어나되, 바로 절위에는 황색이 하늘까지 닿으며 관세음보살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흰옷이 펄펄 날리며 광명이 비치어 산천초목과 의복 기구까지 모두 금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희유한 것을 찬탄했다.



또 상원사 가까이에 반야암(般若庵)이 있었는데, 승속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국왕이 상원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상원사 담화전(曇華殿) 위에 흰 기운이 솟구쳐 올라 흰옷의 관세음보살로 변화하는 것을 보았다.


관음보살은 신장이 3장(丈) 남짓 뒤고 천의(天衣)의 길이가 그보다 1장은 더 되는 듯한데, 원광이 찬란하고 흑 · 적 · 황의 오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호가 장엄하고 광채가 휘황찬란하여 하늘과 땅을 밝게 비추다가 한참 만에 흩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찬탄하고 공경하여 정례하였다.


그 산에서 30리쯤 떨어진 천녕현(天寧縣)의 백성들이 멀리 미지산(彌智山) 허리에 노란 구름이 서리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모두 예배하면서 오늘 대가(大駕)가 상원사에 행차림으로써 저와 같은 서기가 일어난 것이라고들 말하였다는 것이다.


감격한 세조는 절에 쌀 200석을 하사하고 내관으로 하여금 향을 올리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궐로 돌아와서는 죄인들을 사면시켰으며, 정부관원들은 축배를 들어 경하하였고 훈부(勳府)에서는 상원사에 불상을 조성하여 건물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친견한 백의관음보살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숙주, 홍응, 전균을 상원사에 보내어 다시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출처 : 상원사 홈페이지 및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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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의병투쟁 때 법당을 뺀 나머지 건물이 모두 불탔으며, 1918년 화송(華松) 스님이 큰방을 재건하였고, 1934년에는 경언(璟彦)이 객실을 신축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용문산전투를 겪으면서 다시 불에 타버렸다. 1969년 덕송(德松) 스님이 초막을 지어 법등을 다시 밝힌 이래로 점차 절의 모습을 갖추어 가 오늘에 이른다.

상원사는 매우 작은 사찰이다. 전각은 대웅전과 삼성각이 전부이며, 대웅전에 석가모니와 함께 협시불로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그외로는 스님들께서 수행 정진하는 '용문선원'이 있고 기타 요사채 들이 상원사의 전부이다. 하지만 작은 규모의 사찰이지만 왠지 모르는 기도와 수행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