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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가득한 봉선사를 찾아서 ..

산풀내음 2019. 7. 22. 20:52


광릉수목원 가는 길에는 조계종 제 25교구 본사인 봉선사가 있다. 재작년 7월 처음 찾은 봉선사는 올해도 축제로 한창이었다. 매년 7월이면 그리고 올해로 17번째를 맞이하는 봉선사 앞마당에서의 연꽃축제가 바로 그것이다. 태풍의 영향으로 많은 비가 예상되어 걱정스러웠는데 예상과 달리 태풍이 일찍 소멸되어 축제에는 아무른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축제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년)에 법인 국사께서 창건하시고 운악사라고 하였다. 세조가 죽은 이듬 해인 예종 1년(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곳으로 모시고 이어 당사를 초창하여 선왕의 능침의 명 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봉선사(奉先寺)​라 하였다. 선영을 받드는 절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당시 봉선사는 교종 본찰로 선종 본찰이었던 봉은사와 함께 양대산맥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봉선사 역시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화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큰 피해를 입은 봉선사는 1637년 계민 선사에 의해 복구되었지만,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소되었다. 지금의 당사들은 이후 복원된 것이다.

조계종의 유일한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가 봉선사에서 일가를 이룬 월초스님 등이 사찰의 정재와 사재를 털어 세워졌다. 월초스님은 1902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전국 사찰의 관리서를 두었다. 1904년 원흥사가 문을 닫게 되자 원흥사의 전각 일부와 불상, 불화 등 불구 일체를 봉선사로 옮겼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대적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5년 원흥사 자리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월초스님의 제자 운허스님은 은사의 유업을 이어 의정부와 남양주지역에 광동학원을 설립했다.

봉선사 일주문으로 한글로 표기된 것이 이채롭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먼저가신 선왕의 위업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절을 중창하고 절 이름도 운악사에서 봉선사로 고쳐 불렀다. 이때 절입구 양지바른 곳에 느티나무 한그루를 정성스럽게 심었으니 이 나무의 나이가 벌써 500살이 넘은 것이 된다.

느티나무 정면에 설법당이 있고 왼쪽으로 돌아서면 설법당 옆에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길상사에서 볼 수 있는 관음상(천주교인이 조각한 관음상)과 흡사 비슷한데, 종교 통합이란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낯설다.


큰법당, 봉선사는 특징적으로 운허큰스님께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경전을 한글번역작업을 하신분이라서 대웅전이라는 명칭을 큰법당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어서 편액을 달았다 .


큰법당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우측에 관음전이 있고 좌측에 지장전이 있다. 

관음전, 원래는 노전 스님이 머무는 노전채였던 것이, 6.25때 전소되었다가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1999년 복원되어 지금은 관음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



지장전, 원래는 어실각(御室閣)으로서 세조대왕과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건물이다. 이 또한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1999년에 복원하여 지금은 지장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




약사여래부처님의 개금불사가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