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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검단사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다

산풀내음 2019. 8. 28. 22:05


법화전 옆, 샘물


파주를 갈 일이 생겨 우연히 알게 된 사찰, 검단사에 다녀왔다. 그닥 잘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지만, 작고 아담한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사찰이었다. 검단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았다. 검단사에서 소개한 자료 등에 따르면 검단사(黔丹寺)는 847년(신라 문성왕 9) 진감 혜소(眞鑑 慧昭, 774-850)께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혜소스님은 신라의 스님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범패(梵唄)를 전하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꿈에 어느 인도 스님이 찾아와 "당신의 자식이 되겠다" 하고는 유리병을 주고 갔는데 그 후 그를 잉태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나 너무 가난하여 시장 모퉁이에서 조금만 장사를 하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기꺼이 부모에게 봉양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도를 구하려는 뜻이 간절했다. 804년(애장왕 5년) 31세에 세공사 (歲貢使)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마조 도일(馬粗道一) 의 제자 창주 신감(滄洲 神鑑)의 제자가 되었다가 득도한 후 거기서 법을 이어받았다.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는 당에서 귀국 후 하동 쌍계사에 머물며 수많은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 스님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범패를 작곡했는데, 누각 이름을 ‘팔영루’라 지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스님은 중국에서 차 씨앗을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보급했다고 한다. 화개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벚꽃길에 차 시배지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나 절 입구에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란다. 스님은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한다. (출처 : 불교저널, "14. 진감선사 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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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으로서 또 다인으로서 추앙받고 있지만 혜소 스님의 진면목은 선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동방성인(東方聖人)'이라 불렀고, 또한편 얼굴이 검었다하여 '흑두타(黑頭陀)'나 '검단(黔丹)'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사찰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검단사는 조선시대에는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인 장릉(長陵)의 원찰이었다. 처음에는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지만, 영조 때인 1731년 장릉을 탄현면 갈현리로 옮길 때, 이 사찰도 현재의 탄현면 성동리 오두산으로 옮겨왔다. 검단사는 장릉에 제향을 지낼 때 절에서 두부를 만들어 한때 두구사(豆拘寺)라고도 했다. 근대에 들어와 1906년 김정호(金正昊)가 절을 중수했고, 일제강점기 때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다. 1986년 천오(天悟)가 주지로 부임하여 법화전을 중건하였고, 2005년 해송(海松)이 절을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백과 사전)

검단사의 대표적인 전각은 주불전인 무량수전과 명부전, 법화전이다. 무량수전과 명부전은 한글로 현판이 되어있고, 주련 또한 한글로 되어있다. 한글 현판과 주련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찰은 남양주의 봉선사일 것이다. 한자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봉선사의 한글 현판과 주련을 처음 봤을 때도 다소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검단사에서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특히 새롭게 지어지는 법당의 경우에는 한글 현판과 주련에 더하여 그 뜻 또한 한글로 만들어, 예를 들면 봉선사의 대웅전을 '큰법당'이라고 한 것과 같이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변모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검단사 주불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검단사의 법화전엔 목조관음보살좌상(경기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44호)이 모셔져 있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은 보통 관음전이나 원통전으로 표시하는데 이곳은 법화전이라고 되어 다. 게다고 최근에 지어진 무량수전과 명부전과는 달리 현판은 한자로 되어있다. 현판이 한자로 된 것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건물이어서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왜 법화전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찰의 자료에 따르면 목조관음보살좌상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이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비교적 작은 크기로 고개를 약간 숙인 정삼각형 꼴의 둔중한 모습이다. 살찐 얼굴에 늘어진 귀, 짧은 목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서 두 손으로 정병을 감싸든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머리카락은 귀를 덮고 양 어깨에 붙어 있는 느낌 이 들며, 둥근 어깨를 한 풍만한 신체에 법의를 걸치고 있다. 의습선은 왼쪽 어깨에 단계적으로 중첩된 직선을 보이고 있고 양쪽 팔의 안쪽에 접힌 자락은 비교적 부드러운 곡선이며, 손 목에서 살짝 제껴져서 뒤쪽으 로 넘어간 자락은 2개의 계단 식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덮인 가사는 그 끝이 꽃모양처럼 둥글게 조각되었고, 왼쪽 어깨를 덮은 자락은 뒤로 넘어가서 긴 삼각형 꼴로 드리워져 있다. 양쪽 다리의 주름은 결가부좌 한 발목 부분에서 부채꼴로 벌어졌는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왼쪽 어깨에 꽃모양 같은 가사표현이나 다리 사이의 곡선형 부채꼴 주름 모양은 18세기 초반에 제작된 불상에서 확인 되는 제작기법이다. 또한 가슴에는 군의(裙衣)의 자락을 묶어서 접은 주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해 대각선으로 조각되었는데, 이러한 표현 역시 18세기 불보살상에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정병을 따로 조각해서 두손에 끼웠는데, 이는 15세기 이후에 제작된 불화나 판화에서 보이는 주자형 정병이다. 비록 검단사 주불전에 봉안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얼굴과 의습선에 부드러운 감이 남아있고 대각선형 군의표현을 볼 때 18세기 후반 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연구하는데 가치가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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